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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이 중에 첫째로 태어난 사람 손들어 보세요.” <EBS 하버드특강 ‘정의’ 영상에서 캡쳐> 기억에, 언젠가 마이클 샌댈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어디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EBS에서 ‘하버드 특강—정의’라는 제목으로 영상을 제작해줘서 이걸 보고 책도 사 보고 했었는데, 그 중에 ‘능력주의’에 대한 수업 중 한 장면이 계속 머리에 남아있었다. 어떤 학생이 ‘하버드’라는 졸업후 소득 기대값이 매우 높은—이걸 명문대라고 하는 것이다— 대학에 입학해서 누리는 기회의 어느 정도가 그 학생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토론 중 샌댈 교수가 “이 중에 첫째로 태어난 사람 손들어 보세요.” 라고 했다. 결과는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느낌상 과반을 훌쩍 넘어선다. 물론 어딘가의 기사에서는 어떤 하버드 강의—이거 아니었을까— 에서 첫쨰가 80%에 달했다는 얘기도 있고, 또다른 기사에서는 입학생 설문 결과 외동을 포함한 첫째의 비율은 55%로 조사됐다는 얘기도 있다. 하버드에 입학하는 인구집단별 가구당 출산율 등을 따져보면 저 체감적 비율이 정당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본인의 ‘능력’을 따지는데 있어서도 출생순서와 같이 전적으로 ‘비자의적’인 요소가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명확히 보여줬다는 점이다. 열심히 노력하고 정진한 덕분에 하버드 입학이라는 정당한 보상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마치 첫째로 태어난 것이 노력하고 정진하는 능력에도 혜택을 줄 수 있다는 것으로 보이니까 말이다. 앤서니 워너, “비만 백서”, 브론스테인, 2022.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정의’라는 관념은 단순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더 ‘정의로운’ 결정을 내리는 문제는 사회가 복잡한만큼 한없이 복잡하다. 마찬가지로 ‘비만’이라는 관념은 단순하지만 개인과 사회가 ‘비만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우리의 몸 그리고

정치와 경제는 별개라는 착각

  예를 들면 이런 것. <링크의 한겨레 기사에서 발췌(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802674.html )> ‘정경 분리’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세속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여 국가에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한편 특정 종교적 신념에 기반한 정책 운영을 차단하는 ‘정교 분리’라는 표현을 경제에 적용한 것일텐데, 북한이나 일본 등과의 정치적 갈등과 별개로 경제적 협력은 지속적으로 추진하자는 주장이나, 혹은 ‘정경 유착’이라고 정치 권력과 결탁하여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쌓음으로써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는 문제의 반대급부로 언급되는 그런 개념인 듯 하다. 이런 개념을 접하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모르긴 몰라도 많은 사람들은 정치가 경제에 영향을 주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그 반대급부로 이를 분리하자는 주장에 대체로 동의하지 않을까. 미리 얘기해두지만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특히 어떤 정치 권력이 특정 경제주체와 결탁하여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행위는 정의롭지도 않고, 혹은 누군가 호도하듯이 전체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는 것이 내 관점이다. 재커리 D. 카터, “존 메이너드 케인스”, 로크미디어, 2022년. 하지만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에서 당위성을 느끼는 것만큼 이 둘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는 것은 명확히 인지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이 책을 보면서 했다. 통화 안정의 진정한 원천은 금을 교환 매체로 선택한 정치권력의 공적 정당성에 있었다. 정치권력 없이 돈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p291. 정의로운 통화 정책을 위해 ‘금본위제’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둥, 이런 주장이 한 번씩 보인다. 애초에 금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기반한 화폐 발행이야말로 정부가 마음대로 화폐를 발행하여 화폐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실물자산을 갖지 못한 ‘서민’들의 부를 강탈하거나, 고소득층 혹은 자본가들의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