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내 어린 시절은 소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소위 훌륭한 고전 문학이든, 싸구려 무협지든. ‘이야기’ 자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어머니께서 이런저런 동화를 읽으시는 걸 녹화해둔 카세트 테이프다. 여섯 살 즈음의 기억이어서 형님한테 물어보니 산업의 역군으로 사우디에 나가 계시던 아버지께 보내는 음성편지 개념으로 내가 네 살 즈음 시작해서 힘들이지 않고 동화책을 반복해서 읽어주는 수단으로 변화한 모양인데, 내용도 제목도 기억나지는 않지만 카세트라는 걸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제법 좋아했었나보다 싶게 거의 35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다. ‘읽기’에 본격적으로 재미를 들이기 시작했던 건 아마도 초등학교 때였나, 부엌과 화장실을 가르는 벽면에 세워진 책장 가득 꽂혀 있던 수많은 책 중에 세계 위인전, 공상과학소설, 추리소설의 전집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제일 쉬운 위인전부터 — 실질적으로 픽션에 가까운 — 공상과학소설, 그리고 조금 더 어려운 추리소설 전집을 읽어나가면서, 소설의 전개를 참을성 있게 읽어가다보면 어느 순간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흐름에 빠져들며 극적인 마무리로 이어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그 당시 동네에 많았던 ‘도서대여점’이라는 곳을 통해 무협지라는 장르에 탐닉했더랬다. 나름 3권짜리 장편소설을 하루이틀 밤새 다 읽고 다음 책을 빌리고 하느라 용돈 부족에 허덕였는데, 그 때 읽은 책들이 나중에 알고 보니 ‘신무협’이라는 장르의 초기작으로 분류되는, 거의 신적 존재로 성장하는 남자 주인공과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미녀들로 가득한, 약간 B급 작품이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중요한 건 아니다. 고등학교 때는 제 깐에 조금 더 문학성을 따졌는데, 결국 다시 무협지와 — 이 때 김용의 작품들이나, 국내 신무협 작가들 중에서도 괜찮은 작가들 작품을 따져가면서 읽었더랬다 — 조금 더 장르를 넓혀서 판타지 소설들이 내 주요 관심사였다. 여기에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