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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22의 게시물 표시

사랑을 베풀기 위해 필요한 것

 돌이켜보면, 내 어린 시절은 소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소위 훌륭한 고전 문학이든, 싸구려 무협지든. ‘이야기’ 자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어머니께서 이런저런 동화를 읽으시는 걸 녹화해둔 카세트 테이프다. 여섯 살 즈음의 기억이어서 형님한테 물어보니 산업의 역군으로 사우디에 나가 계시던 아버지께 보내는 음성편지 개념으로 내가 네 살 즈음 시작해서 힘들이지 않고 동화책을 반복해서 읽어주는 수단으로 변화한 모양인데, 내용도 제목도 기억나지는 않지만 카세트라는 걸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제법 좋아했었나보다 싶게 거의 35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다. ‘읽기’에 본격적으로 재미를 들이기 시작했던 건 아마도 초등학교 때였나, 부엌과 화장실을 가르는 벽면에 세워진 책장 가득 꽂혀 있던 수많은 책 중에 세계 위인전, 공상과학소설, 추리소설의 전집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제일 쉬운 위인전부터 — 실질적으로 픽션에 가까운 — 공상과학소설, 그리고 조금 더 어려운 추리소설 전집을 읽어나가면서, 소설의 전개를 참을성 있게 읽어가다보면 어느 순간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흐름에 빠져들며 극적인 마무리로 이어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그 당시 동네에 많았던 ‘도서대여점’이라는 곳을 통해 무협지라는 장르에 탐닉했더랬다. 나름 3권짜리 장편소설을 하루이틀 밤새 다 읽고 다음 책을 빌리고 하느라 용돈 부족에 허덕였는데, 그 때 읽은 책들이 나중에 알고 보니 ‘신무협’이라는 장르의 초기작으로 분류되는, 거의 신적 존재로 성장하는 남자 주인공과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미녀들로 가득한, 약간 B급 작품이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중요한 건 아니다. 고등학교 때는 제 깐에 조금 더 문학성을 따졌는데, 결국 다시 무협지와 — 이 때 김용의 작품들이나, 국내 신무협 작가들 중에서도 괜찮은 작가들 작품을 따져가면서 읽었더랬다 — 조금 더 장르를 넓혀서 판타지 소설들이 내 주요 관심사였다. 여기에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까

유레카 모먼트는 없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모먼트 (from Wikipedia) 유레카 모먼트라는 말이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철학자라고 해야겠지?) 아르키메데스가 왕으로부터 순금으로 만들었다는 왕관의 순도 증명 방법을 고민하다가 목욕물이 넘쳐흐르는 것을 보면서 답을 깨달으면서 외쳤다는 유명한 말에서 파생된 표현이다.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살면서 크든 작든 이런 순간을 겪기 때문에 더더욱 직관적으로 잘 와닿는 표현이고, 그만큼 대중적으로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은 — 이 주장을 입증할 시간과 의지가 부족하다는 — 표현이기도 하다. 핵심은 ‘고민하다가’이다, ‘깨달으면서’가 아니라. 우리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신경회로의 연결이 변화하는 — 형성되거나, 강화되거나, 쇠퇴하는 — 과정이다. 우리가 어느 순간 이전에 몰랐다고 생각했던 것을 깨닫는 경험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가 연결되는 경험이다. 이야기 속의 아르키메데스는 통에 가득찬 목욕물에 몸을 담그기 이전에 이미 부피와 질량에 대해 알고 있었고, 물질마다 이 비율이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단지 순금 왕관의 순도를 측정하는 문제에 있어 왕관과 동일 질량의 순금이 밀어내는 물의 양을 비교하는 비파괴적 검사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 뿐이다. 자신의 몸이 밀어내는 물의 양을 보면서 원래 알고 있던 지식들이 연결되며 오래 고민했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는 확신을 느꼈을 때 아르키메데스가 얼마나 짜릿했을까. 왕이 의뢰한 것이라 하니, 어쩌면 이 해답에 그의 안녕이 달려있었을 지도 모르겠다(발가벗은 채로 뛰쳐나갈만하지 않을까ㅎㅎ). 그리고 그가 찾아낸 방법으로 왕관에 불순물이 섞여 있다는 것이 증명됐다는 훈훈한 이야기 뒤에 왕관을 만든 장인의 안녕이 위태로웠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지만, 여기까지는 나가지 말자. 아무튼 이게 혁신의 아이콘인 잡스가 ‘커넥팅 닷’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한 것이고,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연결할 점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대중적으로 간과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