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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모먼트는 없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모먼트 (from Wikipedia)

유레카 모먼트라는 말이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철학자라고 해야겠지?) 아르키메데스가 왕으로부터 순금으로 만들었다는 왕관의 순도 증명 방법을 고민하다가 목욕물이 넘쳐흐르는 것을 보면서 답을 깨달으면서 외쳤다는 유명한 말에서 파생된 표현이다.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살면서 크든 작든 이런 순간을 겪기 때문에 더더욱 직관적으로 잘 와닿는 표현이고, 그만큼 대중적으로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은 — 이 주장을 입증할 시간과 의지가 부족하다는 — 표현이기도 하다.


핵심은 ‘고민하다가’이다, ‘깨달으면서’가 아니라.
우리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신경회로의 연결이 변화하는 — 형성되거나, 강화되거나, 쇠퇴하는 — 과정이다. 우리가 어느 순간 이전에 몰랐다고 생각했던 것을 깨닫는 경험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가 연결되는 경험이다. 이야기 속의 아르키메데스는 통에 가득찬 목욕물에 몸을 담그기 이전에 이미 부피와 질량에 대해 알고 있었고, 물질마다 이 비율이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단지 순금 왕관의 순도를 측정하는 문제에 있어 왕관과 동일 질량의 순금이 밀어내는 물의 양을 비교하는 비파괴적 검사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 뿐이다. 자신의 몸이 밀어내는 물의 양을 보면서 원래 알고 있던 지식들이 연결되며 오래 고민했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는 확신을 느꼈을 때 아르키메데스가 얼마나 짜릿했을까. 왕이 의뢰한 것이라 하니, 어쩌면 이 해답에 그의 안녕이 달려있었을 지도 모르겠다(발가벗은 채로 뛰쳐나갈만하지 않을까ㅎㅎ). 그리고 그가 찾아낸 방법으로 왕관에 불순물이 섞여 있다는 것이 증명됐다는 훈훈한 이야기 뒤에 왕관을 만든 장인의 안녕이 위태로웠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지만, 여기까지는 나가지 말자.

아무튼 이게 혁신의 아이콘인 잡스가 ‘커넥팅 닷’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한 것이고,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연결할 점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대중적으로 간과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기를 쓰고 이런저런 공부를 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할 것이고, 우리나라의 도서출판 시장이 지금보다 몇 배는 커졌을테니까.


톰 올리버,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브론스테인, 2022.


우리는 자신을 주변과는 분리되고 구분할 수 있는 별개의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신체에서부터 뇌와 마음에 이르기까지 여러모로 주변 세상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p21.

‘나’라는 존재가 주위와, 그리고 세상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을지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는 어떨까?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점으로 인식하지만, 사실은 무수한 점을 포함한 복잡한 연결 그 자체이고 심지어 우리가 ‘외부’라고 생각하는 환경과의 경계도 사실은 불분명하다는 사실, 즉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자신’이라는 개념이 우리 뇌가 만들어낸 착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우리가 유레카 모먼트에 갖고 있는 환상처럼 한순간 깨우칠 수 있는 생각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진핵 생물로서 우리의 존재, 장내 미생물군과의 관계, 우리 신체를 구성하는 물질의 순환 주기, 우리가 주변 사람과 맺는 사회적 관계 등 이 모든 점들을 고려하면 — 점(dot)이다 —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세상과 독립된 개체로서의 ‘자신’이라고 느끼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라는 점은 거의 명백한 것 같다.


개별 병리학을 버리고 상황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무릎을 치면서 ‘유레카!’를 외칠 깨달음의 순간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p186.

톰 올리버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는 가능한 거의 모든 과학적 사실에 기반해 우리가 세상과 어떻게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려준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여전히 ‘나’라는 존재를 독립된 자아로 느끼는 동시에, 이 느낌 자체가 나의 뇌가 진화적 필요에 위해 만들어낸 것일 뿐 실제로는 얼마나 주위 환경 그 자체와 영향을 주고 받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과정은 일종의 유레카로 이어질 수 있지만, 이 책이 전해주는 지식 — 우리와 세상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인식 — 은 책에서도 말하듯이 점진적인 과정이며 한 순간의 깨달음으로 이루어질 수도 없고, 이뤄져서도 안 되기 때문에 이것이 어떤 순간일 수는 없다.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면, 각자의 배경지식과 세계관에 따라 조금 더 세상의 연결성을 수용하거나 덜 수용하겠지만, 읽기 전보다 세상이 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책에서도 얘기하듯, 인류가 당면한 복잡한 문제점들 — 기후위기라든지, 탈세계화라든지, 다양한 사회 문제들 — 은 환원주의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것들이므로, 그 해결의 실마리라도 찾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 시작이나 과정으로 탁월한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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