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그래도 조금씩은 달려봐야겠다.

나는 달리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달리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달린다는 행위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하나의 취미로서의 달리기를 내 일상에 도입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말이다.
 내가 일상에서 달리기라는 취미를 배제한 첫 번째 이유는 재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 첫 번째 취미인 농구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 30여년 간 농구를 첫 번째 취미로 두면서 지속적으로 관절을 소모시켰기 때문에, 나는 무릎과 허리에 충격이 가해지는 행동은 되도록 안 하려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달리기가 심혈관계와 정신 건강에 미치는 좋은 영향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소모품인 연골을 아끼기 위해서 달리기를 되도록 안 하며 살아왔다. 게다가 첫 번째든 두 번째든 취미는 취미일 뿐이기 때문에, 취미보다는 일에 집중하게 되는 시기를 살면서 자연스럽게 취미를 즐길 시간 자체가 너무나 소중한 자원이 되었다. 즉, 어느 쪽으로든 달리기로 농구를 대체할 것이 아니라면, 달리기를 안 하는 선택이 나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던 것이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하지 않는 행동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도 점점 더 움직이지 않게 되는 법이다. 달리기에 대한 나의 감정도 마찬가지여서, 10여년 전에 친구 따라 여의도에서 하는 나이키 'We Run' 이었나 하는 10km 달리기를 하고 앞으로 야외에서 달리기를 굳이 사서 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굳힌 이후 단 한 번도 취미로 달리기를 하고 싶다고 느껴본 적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달리기를 해 봐야 하나 싶은 마음이 살짝, 아니 제법 들기 시작했다.

정신 질환 책 vs. 달리기 책

시작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을까?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벨라 마키, 2019, 시작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을까?, 비잉.

이 책은 심각한 공황 장애를 겪던 작가가 결혼 8개월만에 이혼을 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겪은 후 그냥 뭐라도 해야지 싶어서 시작한 달리기라는 끈이 사실은 황금 동아줄이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달리기 책이다. 음.. 달리기 책이라고 하기에는 작가의 인생을 크게 좌우한 정신 질환을 더 많이 다루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달리기 책이다.
 작가는 본인이 심각하게 앓았던, 그리고 여전히 앓고 있는 각종 정신 질환들과 이 문제들에 잡아먹히지 않고 자신을 살린 - 부제가 "나를 살린 달리기"이다 - 달리기에 대해서, 자신의 이야기에 인터뷰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해 친절하게 설명한다. 특히 본인이 앓아 온 정신 질환 - 강박 장애, 공황 장애, 공포증, 범불안장애 - 등에 대해서는 친절하다 못해 매우 실감나게 설명한다. 나를 비롯해 운 좋게 이런 류의 질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달리기에 대해서도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는지, 처음 달렸을 때의 상황과 심리 묘사, 달리기를 통해 어떤 것을 이겨냈고, 어떤 것은 이겨내지 못했는지, 같이 달리는 사람들은 왜 달리고 달리기를 통해 무엇을 얻는지 이야기한다. 특히 작가가 처음으로 달렸을 때에 대한 묘사는, 성취든 효과든 너무나 미약해서 오히려 너무나 인상적이다.
"그렇게 중간에 쉬어 가며 무려 3분이나 달린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기분이 좀 나아졌냐고? 아니. 달리는 게 재미잇었냐고? 아니. 하지만 최소한 15분 동안 울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였다."
- 시작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을까?, p16.
이렇게 미약하게 시작한 달리기를 통해 작가는 오랜 기간동안 자신을 괴롭혀 온 정신 질환들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 과정을 설명하면서, 작가는 다양한 연구 결과를 함께 제시함으로써 본인과 몇몇 인터뷰이의 경험이 몇몇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달리기의 효과라는 것을 뒷받침한다.
 또한 달리기만으로 본인의 모든 정신질환을 완벽하게 극복했다거나, 달리기만이 모든 정신적인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식의 태도는 일절 취하지 않는데, 이것이 또한 이 책의 큰 장점 중 하나이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만병통치약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운동일 것'이라는 류의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이 만병통치약 후보의 대표주자인 '달리기'라는 것을 통해 본인의 큰 어려움 중 하나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많은 연구결과를 접하다보면 충분히 편향된 시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인지라는 것은 패턴을 찾아내는 데 특화되어 있고, 패턴을 찾아낸다는 것은 세부적인 내용을 잃더라도 상황을 단순화시킨다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 책은 달리기에 좋은 점이 많지만 달리기 자체에 중독되어 삶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꼭 달리기여야만 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달리기는 나의 안정제다. 힘든 순간을 겪고 있을 때나 겪은 후에 달리기를 통해 마음이 안정된다. 당신의 안정제는 또 다른 형태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것저것 시도해보며 안정제를 찾기 바란다."
- 시작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을까?, p332.

그래도 조금씩은 달려봐야겠다.

다시 나의 '안정제'인 농구 얘기로 돌아가보자. 내가 일과 삶에 집중하며 포기해온 수많은 취미에도 불구하고 농구를 놓지 않은 큰 이유 중 하나는, 농구를 하면서 눈 앞의 경쟁에 집중하고 그 경쟁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몰입감, 즐거움, 자기효능감, 자존감 등의 유익이 부상이나 관절의 소모 등의 위험이나 소요되는 시간 등의 비용 대비 훨씬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름 고강도 운동이기 때문에 심혈관계 건강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단체 종목이기 때문에 팀에서 소속감도 느낄 수 있다. 모두가 이 책에서 달리기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장점들이다.
 다만, 문제라고 하면 일주일에 2~3회를 하기에는 1회 소요되는 시간과 체력이 너무 커서 꾸준히 효과를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대신 나는 가능하면 회사 안에 있는 휘트니스 센터에서 15분 정도 사이클을 타고 스트레칭을 함으로써 운동량을 유지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내가 얼마나 달리기를 배제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유산소 운동을 하면서 하체 근육을 단련하는 데 자전거가 도움이 되는 것도 이유지만, 괜히 무릎에 충격을 주고 싶지 않다는 것도 굳이 달리기 대신 사이클을 선택한 이유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묘하게 다시 달리기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에, 15분의 사이클을 약 12분의 달리기로 대체한 프로그램을 시도해보고 있다. 최고 속도 12km/h로 10분을 뛰면 2km, 전후 1분 정도씩을 웜업과 쿨다운 구간으로 쓰면 약 2.2km를 뛰게 된다. 이 정도가 책을 읽은 직후 내가 당장 아무 준비 없이 달리기를 시도했을 때 가능한 기준치이고, 앞으로 최고 속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접근해보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얘기는 이 책을 읽은 5~6주 전 얘기고, 그 동안 급하고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부시간 확보를 위해 휘트니스 센터에 전혀 가지 않았기 때문에 - 농구도 전혀 하지 않았다 - 지금은 저 프로그램을 소화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먼저겠다.

아무튼 이 책은 달리기의 효과를 너무 전문적이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근거있게, 균형 잡힌 입장에서 얘기해주는 책으로, 달리기에 대한 열망을 일으킬 수 있는 책이다. 특히 달리기가 이런저런 건강에 좋다고는 하는데, 막상 하려니 너무 귀찮고 자꾸 포기하게 되는 사람이라면 습관을 형성하는 첫 단계인 열망을 일으키는 수단으로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강하게 권한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외국보다 한국 초코파이가 초코 함량이 더 높은 이유

여느 몹쓸 공돌이 개그  언젠가 돌아다니던 초코파이 초코 함량 계산식. 답은? 무려 약 31.8%다. 이 정도면 빈츠보다도 높은 함량일지도.. 자고로 무릇 공대생 혹은 공돌이라 하면 '일반인' - 여기서는 비 공대인 -이라면 알 필요도 없는 기호로 범벅이 된 수식을 붙들고 밤을 샌다든지, 거기서부터 파생된 온갖 과제를 하느라 밤을 샌다든지,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들끼리' 머리를 싸메고 수시로 밤을 새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밤을 샌다는 건 낮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고 곧 '일반인'들과의 소통의 기회가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다보면 시나브로 쌓이는 전공 지식과 함께 '바깥 세상'에 대한 환상 그리고 '일반인'들과의 유머적 단절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씩 키우게 되는데, 이런 것들을 비틀어 탄생한 것이 공대 개그 혹은 공돌이 개그이다. 예를 들어 '외국보다 한국의 초코파이가 초코 함량이 더 높은 이유'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면 당신도 훌륭한 공돌이일 가능성이 높은데(힌트는 위 수식을 영어로 바꿔보라는 것이고, 답은 마지막에..), 무릇 공돌이라 하면 이렇게 공돌이를 위한 개그를 이해하고 웃을 수 있는 소양을 갖추게 되고, 일반인들은 해설이 있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개그까지도 즐기면서 모종의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에, 다시 일반인들과의 유머적 단절은 더 공고해진다. 이런 거에 웃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다. - 출처: 나무위키 ' 공대개그 ' 페이지. 나 또한 정통한 공돌이로서 - 입사 전까지 같은 건물에 10년을 들락거렸다! - 유사한 과정을 거쳤고, 일요일 밤을 지배하던 주류 개그는 1도 모르지만 각종 공돌이 개그에는 피식거리는 단계에 도달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이런 상황에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질량이 없는 물질'만 만날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 날로 있는...

차멀미가 날 때는 앞을 봐야 한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가족 여행을 가면 나는 꼭 어디에 도착해서야 잠에서 깨곤 했다. 그 때마다 조수석의 어머니께서는 좋은 경치는 하나도 못 보고 밥 먹을 때만 일어난다고 핀잔을 주곤 하셨는데, 아무리 깨어 있으려고 해도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난 여지 없이 곯아떨어졌다. 성인이 된 후에 생각해보니 그 시절의 나는 차멀미를 했던 것이었다. 멀미라는 건 눈과 귀 - 정확히는 전정기관 - 에서 감지되는 움직임에 대한 정보 불일치를 뇌가 불편하게 느끼는 현상이라고 이해하면 얼추 맞을텐데, 차에서 스마트폰을 볼 때 속이 더 메슥거리거나, 운전자는 멀미를 하지 않는 걸 생각해보면 된다. 차멀미를 할 때는 먼 산을 보라거나,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마시라거나 하는 민간요법이 전해지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다 소용 없는 일이다. 달리는 차 창문을 열고 머리 날리게 바람을 맞으면서 볼 것도 없는 먼 산을 아무리 노려보고 있어도, 멀미는 잦아들지 않았다. 조수석에라도 앉을 수 있다면 좀 나았겠지만 조수석에 갈 짬은 전혀 아니었으니 가장 확실히 멀미를 피하는 방법은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는데, 이걸 어느 정도 인지한 다음에는 메슥거림이 느껴질 때는 일부러 눈을 감고 잠드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아마 이 기전이 몸에 쌓이면서 차만 타면 자는 식으로 몸이 반응한 게 아닐까.  ""과학의 속도가 윤리적인 이해 수준을 넘어서면, 사람들은 각자가 느끼는 불편함을 표현하느라 애를 먹게 된다." 2004년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쓴 글이다." - 유전자 임팩트, p620. 어른이 되면서 멀미 자체에 대한 민감도도 떨어진데다 이제는 어디 갈 때 거의 운전석에 앉기 때문에 멀미에 시달릴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급변하는 세상과 기술의 발전을 보고 있으면 가끔 속이 울렁거릴 때가 있는데, 이럴 때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케빈 데이비스, " 유전자 임팩트 ...

6살짜리 아이에게 지수 개념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내 6살짜리 아이에게 얼마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큰 수는 '백천무한'이었다. 아직 하나하나 차근차근 세어 나가면 100 넘게도 셀 수 있긴 하지만, 여전히 68 다음은 뭐냐고 물으면 '13?' 이렇게 아무 숫자나 생각나는대로 얘기하는 게 아이의 수준인데, 백 다음에는 천이 있고, '무한'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는 걸 어디서 줏어들은 모양인지, '엄청 많다'는 얘기는 모두 다 '백천무한개'로 퉁치던 게 불과 한두달 전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녀석이 '조'라는 게 있다던데, 이러면서 또 아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파온다. '억'이라는 단위가 있는 줄도 모르는 아이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나? 일단 '만'과 '조' 사이에는 '억'이라는 게 있다고 설명은 해 줬는데, 사실 '만'과 '조' 사이에는 '억' 말고도 '십만', '백만', '천만'도 있고, '십억', '백억', '천억'도 있으며, 조 다음도 같은 모양이로 계속 늘어난다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해주면 되지? "또한 우리는 모두 머리 속에 일종의 숫자 선, 즉 마음 속 숫자 축을 갖고 있어, 계산할 때 그 축 위에서 움직이는 법을 배운다." - 우리의 뇌는 어떻게 배우는가, p208. 나름 고등교육을 받아서, 실수 축과 허수 축, 도메인 전환과 같은 개념을 섭렵한 아빠와 달리 이제 6살인 아이는 실수 축에서 정수, 그 중에서도 자연수 영역의 일부에 대해서 이런 심상을 만들어가야 하는 단계인데, 여기서 1씩 세기로 가기에는 억이니 조니, 너무나 험난한 영역의 얘기인 것이다. "놀랍게도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2차원 지도상에서 데이터를 나타내는 걸 배울 때 이 영역이 활성화된다. 그 데이터가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