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6살짜리 아이에게 얼마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큰 수는 '백천무한'이었다. 아직 하나하나 차근차근 세어 나가면 100 넘게도 셀 수 있긴 하지만, 여전히 68 다음은 뭐냐고 물으면 '13?' 이렇게 아무 숫자나 생각나는대로 얘기하는 게 아이의 수준인데, 백 다음에는 천이 있고, '무한'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는 걸 어디서 줏어들은 모양인지, '엄청 많다'는 얘기는 모두 다 '백천무한개'로 퉁치던 게 불과 한두달 전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녀석이 '조'라는 게 있다던데, 이러면서 또 아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파온다. '억'이라는 단위가 있는 줄도 모르는 아이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나? 일단 '만'과 '조' 사이에는 '억'이라는 게 있다고 설명은 해 줬는데, 사실 '만'과 '조' 사이에는 '억' 말고도 '십만', '백만', '천만'도 있고, '십억', '백억', '천억'도 있으며, 조 다음도 같은 모양이로 계속 늘어난다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해주면 되지?
"또한 우리는 모두 머리 속에 일종의 숫자 선, 즉 마음 속 숫자 축을 갖고 있어, 계산할 때 그 축 위에서 움직이는 법을 배운다."
- 우리의 뇌는 어떻게 배우는가, p208.
나름 고등교육을 받아서, 실수 축과 허수 축, 도메인 전환과 같은 개념을 섭렵한 아빠와 달리 이제 6살인 아이는 실수 축에서 정수, 그 중에서도 자연수 영역의 일부에 대해서 이런 심상을 만들어가야 하는 단계인데, 여기서 1씩 세기로 가기에는 억이니 조니, 너무나 험난한 영역의 얘기인 것이다.
"놀랍게도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2차원 지도상에서 데이터를 나타내는 걸 배울 때 이 영역이 활성화된다. 그 데이터가 공간 데이터가 아닌데 말이다."
- 우리의 뇌는 어떻게 배우는가, p206.
이런 유레카. 이게 사실이면 핵심은 시각화인 게 아닌가.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10진수 개념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은 아래 그림과 같이 0에서부터 시작해서 99까지를 2차원 배열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7~8년 전 Khan Academy라는 게 있다는 걸 알고 나서 영상을 본 뒤로 언젠가 아이한테 숫자를 가르쳐야 할 날이 오면 써먹어야지 라고 기억해뒀던 방법인데, 보통 숫자 세기를 배울 때 1부터 시작해서 10까지, 그리고 100까지 세기 때문에 아래쪽 그림과 같이 한자리 숫자(1~9)부터 세자리 숫자(100)까지 한 판에 표시되는 것과 달리, 실질적으로 0~9가 1차원 개념이고, 앞에 생략된 0이 붙어서 00~09라는 것만 받아들이면 2차원 개념에서 00~99까지 모두 두(2차원이니까)자리 숫자로 표시된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다.
당장 이 테이블을 그려서 보여주면서 설명을 해 줬다. 당연히 종이에 펜으로 쓰면서 설명해주면 아빠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1분도 안 되서 몸이 배배 꼬일게 뻔해서, 요즘 부쩍 관심갖기 시작한 아빠 컴퓨터에서 drawio.com라고, 엄청 괜찮은 온라인 그림판을 이용해서 00~99와 100, 000~990과 1000, 0000~9900과 10000이 어떻게 똑같은 모양으로 배치되는지 설명해줬는데, 의외로 열심히 쳐다보면서 재법 테이블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다음 단계가 1, 10, 100, 1000, 10000을 일렬로 등간격으로 늘어놓을 수 있다는 얘기였고, 그 다음으로 일, 십, 백, 천과 일, 만, 억, 조, 경, 해, ...를 2차원 배열로 나타낼 수 있다는 얘기였는데... 하필 그 시점에 주문한 치킨이 도착했고, 아이는 치킨 만세!를 외치며 부엌으로 가버렸다.
나에게 이 책은 간만에 만나는 대박 책이다.
저명한 인지신경과학자인 저자가, 본인이 참여하고 이끈 연구를 통해 인간의 학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밝혀낸 인류 공통의 효과적인 학습법과, 교육이 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밝힌 책이다. 아주 술술 잘 읽히는 글솜씨로 쓰여진 책은 아니지만 어려울 수 있는 각종 인지과학 시험 결과와 그 함의를 충분히 깔끔하게 전달하는 책이고, 무엇보다도 아이든 어른이든 배우는 존재로서의 인간 모두에게 유용한 정보 '우리의 뇌는 어떻게 배우는가'에 대해 현대 과학이 밝혀낸 거의 최신의 정보와 이로부터 도출된 효과적인 학습 및 교육 방법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책의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1부 "배움이란 무엇인가?"에서는, 기계학습이 모방하고자 하는 인간의 학습특성으로 살펴본 배움의 7가지 정의와 우리의 뇌가 기계보다 효율적인 학습 능력을 갖고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2부 "우리의 뇌가 배우는 법"에서는, 뇌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유전자 수준에서 갖고 태어나는 지식과 배움을 통해서 획득하는 지식이 어떻게 통합되는지, 특정 영역의 뇌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신경가소성이 극대화되는 시기와 교육이 이 시기를 활용하는 방법 등을 설명한다.
3부 "배움의 네 기둥"에서는, 우리 뇌가 지식을 습득하는 메커니즘으로 볼 때 모든 학습에 필수적인 네 요소인 주의, 적극적 참여, 에러 피드백, 통합에 대해서 얘기한다.
이 중에서도 백미는 2부 "우리의 뇌가 배우는 법"인데, 책의 제목과 결국 같은 말이라는 점에서도 중요도를 알 수 있지만, 우리의 뇌가 유전자와 자기조직화의 영향으로 태생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지식과, 양육 및 교육이 신경가소성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대부분 마무리되는 민감기까지를 고려할 때, 고차원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 또한 기존의 신경세포 구조를 활용하여 이루어진다는 '신경세포 재활용 가설'은 특이 아이의 교육을 고민하는 모든 부모 및 교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 책을, 그리고 특히 2부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뇌가 빈 서판과 같은 상태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 뇌와 사실상 동일한 구조로 시작하며, 이 구조를 강화하고 다양한 형태로 활용함으로써 고차원적인 학습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본적인 숫자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어린 아이들이 사용하는 뇌 회로와, 고차원적인 수학 이론 및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 수학자들이 사용하는 뇌 회로가 동일하고, 심지어 시각 장애가 있어 감각경험에 있어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른 수학자들조차 동일한 뇌 회로를 사용한다는 사실로부터, 교육 및 학습이란 이미 모두가 갖고 태어난 뇌 구조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과정이지, 소위 '수학 하는 머리'란 걸 누구는 갖고 태어나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신경세포 재활용 가설이 얘기하는 격자세포의 작용 개념을 적용해본다고 해서 내 6살 아이가 갑자기 수학 신동이 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뇌가 학습한다고 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내 심상이 이 책을 통해 한층 더 가다듬어진만큼, 앞으로의 어떤 교육에 있어 조금 더 나을 가능성이 높은 방향을 계속해서 고민하고 찾아나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아이의 공부에 아빠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돈 대주고 입 다무는 게 아니라 아빠 스스로가 공부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글 교육에서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 차트하고 같은 원리인 모양이네 ^^
답글삭제치킨 만세에서 빵 터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