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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멀미가 날 때는 앞을 봐야 한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가족 여행을 가면 나는 꼭 어디에 도착해서야 잠에서 깨곤 했다. 그 때마다 조수석의 어머니께서는 좋은 경치는 하나도 못 보고 밥 먹을 때만 일어난다고 핀잔을 주곤 하셨는데, 아무리 깨어 있으려고 해도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난 여지 없이 곯아떨어졌다.

성인이 된 후에 생각해보니 그 시절의 나는 차멀미를 했던 것이었다. 멀미라는 건 눈과 귀 - 정확히는 전정기관 - 에서 감지되는 움직임에 대한 정보 불일치를 뇌가 불편하게 느끼는 현상이라고 이해하면 얼추 맞을텐데, 차에서 스마트폰을 볼 때 속이 더 메슥거리거나, 운전자는 멀미를 하지 않는 걸 생각해보면 된다. 차멀미를 할 때는 먼 산을 보라거나,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마시라거나 하는 민간요법이 전해지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다 소용 없는 일이다. 달리는 차 창문을 열고 머리 날리게 바람을 맞으면서 볼 것도 없는 먼 산을 아무리 노려보고 있어도, 멀미는 잦아들지 않았다. 조수석에라도 앉을 수 있다면 좀 나았겠지만 조수석에 갈 짬은 전혀 아니었으니 가장 확실히 멀미를 피하는 방법은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는데, 이걸 어느 정도 인지한 다음에는 메슥거림이 느껴질 때는 일부러 눈을 감고 잠드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아마 이 기전이 몸에 쌓이면서 차만 타면 자는 식으로 몸이 반응한 게 아닐까. 


""과학의 속도가 윤리적인 이해 수준을 넘어서면, 사람들은 각자가 느끼는 불편함을 표현하느라 애를 먹게 된다." 2004년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쓴 글이다."

- 유전자 임팩트, p620.

어른이 되면서 멀미 자체에 대한 민감도도 떨어진데다 이제는 어디 갈 때 거의 운전석에 앉기 때문에 멀미에 시달릴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급변하는 세상과 기술의 발전을 보고 있으면 가끔 속이 울렁거릴 때가 있는데, 이럴 때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케빈 데이비스, "유전자 임팩트", 브론스테인, 2021.

이번에는 소위 유전자 가위로 불리는 크리스퍼-카스9 시스템과 유전자편집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 유전체 분석에서 복제양 돌리를 거쳐 중국에서 태어난 '크리스퍼 아기'까지, 가끔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떠들 때나 우리 귀에 들어오는 유전자 편집 기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디까지 와 있는지, 무려 <Nature>의 편집자이자 <Nature Genetics>의 창간 편집자 출신의 저자가 친절하게 알려준다(책의 저자소개에는 편집'장'으로 되어 있지만, 저자의 링크드인 프로필을 보면 Assistant Editor, Founding Editor로 되어 있어 일단 편집'자'로 기술함). 무려 '그' 네이처 지의 편집자를 거쳐 현재 <The CRISPR Journal>의 Executive Editor로 일하고 있는 저자보다 이 이야기를 잘 다룰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

책은 간단히 '크리스퍼'로 불리는 크리스퍼-카스9 시스템이 어떤 과정을 거쳐 발견되고, 유전자 편집이라는 목적성을 가진 도구로써 개발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여러 과학자들과 연구소들 간에 어떤 경쟁이 있었고 이 기술의 상업적 가치를 둘러싼 분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한편으로 크리스퍼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지만 유전자 편집이라는 큰흐름에서 크리스퍼가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라는 점, 소위 GMO라고 해서 논란의 중심에 있는 유전자 조작 기술이 유전자 수준에서 교차교배나 자연방사선에 의한 무작위 돌연변이와 다를 바 없는 기술이라는 점, 대중매체에 그려지는 유전자 편집이 갖는 어떤 형질의 강화가 유전학적으로 굉장히 모호하고 기술적으로도 엄청나게 어렵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이를 달성해낼 수 있는 방향으로 차근차근 발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술을 실제로 적용하는 데 있어 광범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크리스퍼는 사회가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어디로 향할 것인지는 우리 모두에게 달려 있다."

- 유전자 임팩트, p642.

무엇보다, 광범위한 논의의 주체에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나,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인 것 같다. 책에도 흥미진진하게 소개된 허젠쿠이 박사의 섵부른 시도가 만들어낸 위험은 정말로 무엇인지, 이에 대한 가치판단에 있어 어떤 관점이 존재하는지 등을 이해하지 않으면, 크리스퍼로 대표되는 유전자 편집기술은 단순히 예쁘고 머리좋고 수명이 긴 신인류를 만들어서 그렇지 못한 인간은 피지배 계층으로 떨어지는 단순한 이야기로 치부되어버릴 수 있다.

이런 선동적인 - 하지만 매력적인 - 이야기 하나로 단순화할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하지만 책에서도 소개되었듯이 기술은 발전할 것이고, 누군가는 실행하고, 누군가는 성공할 것이다. 이 과정을 지켜보고 근본적인 가치에 대해서 사회적인 합의를 만들어내는데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다가올 미래가 이와 같지 않으라는 법은 없는 것 같다.

차멀미를 한다는 건 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한다는 걸 전제한다. 이 차 안에서 나는 뒷좌석에 앉아 멀미를 잊기 위해 잠을 청할 수도 있고, 운전석에 앉아 차를 어디로 가게 할지 결정할 수도 있으며, 조수석에 앉아 운전자가 어디로 갈지 결정하는 데 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내 사례에서의 운전자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아버지였지만, 유전자 편집 기술이라는 자동차의 운전자는 각자의 이해와 동기를 갖고 있는 과학자와 기업가 집단이다. 어디로 갈 지 모르는 자동차의 뒷자리에 앉아 멀미를 잊기 위해 잠을 청하는 것과, 최소한 조수석에 앉아 앞을 바라보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가능성이 높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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