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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20의 게시물 표시

흥미롭지만 남 일 같은

"2018년 봄 무렵, 나는 책상에 앉아, 죽은 뒤 하고 싶은 말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 p335. 별 이유 없이 자기 계발서를 싫어하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와 닿지 않던 말 중에 '내일 세상이 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는'다든지, '내일 당신이 죽는다면 오늘 하고 싶은 일을 지금 당장 하라' 따위의 말들이 있었는데, 딱 드는 생각은 '어쩌라고' 였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결국 현재에 충실하기 위해 끝을 생각하라는 거였는데, 도무지 끝을 떠올릴 수도, 현재에 충실하라는 게 어떤 건지도 실감할 수가 없었다. 십수년이 지나 정말 그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열심히 살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인생의 끝이라는 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머리로는 삶의 유한함을 알고, 시간의 부족함을 아쉽게 느끼고, 문득 돌아보면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실감하지만, 그래도 어떤 형태로든 죽음이라는 것을 실감하지는 못한다. '모든 것이 기록되는 디지털의 시대에 죽음이란 남겨진 사람 혹은 죽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렇게 열심히 사는 와중에 재미 있는 책을 읽었다. 디지털의 시대에 죽음이란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누구나 디지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다양한 디지털 발자국을 남기고, 한계비용이 극도로 낮아진 상황에서 이 발자국들은 발자국 주인의 생사와 무관하게 오래도록, 혹은 영원히도 남는다. 발자국의 주인이 생물학적으로 죽었을 때, 남겨진 사람들 - 가족이나, 온/오프라인 친구, 지인들 - 이 고인을 기억하는 방식 또한 영향을 받는다. 전통적으로 고인의 유산에 대한 접근 권한과 통제 권한을 부여받았던 가족들은 더 이상 그 권리를 자동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오히려 그 권한은 고인이 생전에 디지털 세계에서 가까웠던 친구, 혹은 그 플랫폼을 운영하는 기업이 가진다. 점차, 그리고 이미 생각보다 더 빠르게 생활 반경이 온라인으로 옮겨가는 시대에,

나를 욱하게 하는 사람들 (못 참는 아이, 그리고?)

못 참는 아이 아이를 둔 부모라면 오은영 박사의 < 못 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 >라는 책을 읽어봤거나, 들어는 봤을 것이다. 아이의 육아를 고민하며 아내와 같이 이런저런 육아 관련 서적들을 사 모으던 시절 - 솔직히, 다 읽지는 못했다 - 아내가 골라온 책이다. 제목도 좋고 내 기억에는 내용도 나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아내는 각론보다는 이상 - 욱하는 순간 좋은 육아는 글렀다는 느낌의 - 을 강요하는 느낌을 받아 불편하더라고 평했던 책이다. 여기서 핵심은 '각론'일 것인데, 잘은 모르지만 심리학이라는 것이 자연과학처럼 딱 떨어지는 인과를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가 주요한 원인이 아닐까 싶다. 어떤 행동이라는 결과까지 수많은 원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명쾌한 정리가 불가능한데, '못 참는다' 라는 아이의 행동과 '욱 한다'는 어른의 행동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적일 것이다.  결국 '아이는 왜 이렇게 못 참는가?'라는 질문과 '나는 왜 이렇게 욱하나?'라는 질문은 풀리지 않는 채로 남는다. 어쨌든 아이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부모를 시험한다는 것을 새삼 자각하면서. 말 안 통하는 부모와 직장 상사 사춘기를 겪어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의 가치관이 형성된 성인이라면 대부분의 부모와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하고, 심하게는 좌절스러웠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대체로 인생과 세상에 대한 관점, 특히 정치에 대한 관점에서 이런 충돌이 일어난다.  건전한 토론이라는 미명 하에 정치 이슈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 시작하지만, 서로 자기 말만 끝없이 반복하며 감정만 소모되고 있다는 것을 깨닿는 순간이 있다. 이렇게 되면 부모는 자식을 몽매한 철부지로 취급하고, 자식은 부모를 완고한 꼰대로 규정해버린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관대한 인간이라는 존재답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지는 않는다.  부모-자식 간이 아니라더라도, 가까운 가족 간의 이러한 갈등은 흔한 것 같다. 개

자존감이 한 톨 높아지는 순간

내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자각하며 묘한 뿌듯한 느낌을 받는 순간. 정작 학생일 때는 볼펜을 끝까지 써본 기억이 거의 없다. 매번 잃어버리거나 망가지거나. 솔직히 지금 쓰는 펜이 워낙 빨리 닳긴 한다. 매일 공부를 하고,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다 보면 두 달도 채 못 가는 느낌인데, 펜 구매비용을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사정이 나쁘지는 않고, 사용감이 워낙 마음에 드니 계속 사용 중. 하나를 다 쓰고 항상 들고 다니는 예비를 새로 꺼내드는 순간 스스로에게 느끼는 만족감은 덤인데, 이 덤 덕분에 또 동기부여가 된다.

장인어른의 은퇴를 앞두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휩쓸 것 같은 사회적인 공포가 어느 정도 지나가고, 정부가 '생활 속 거리두기'로 지침을 완화한 5월, 장인어른의 은퇴 소식을 들었다. 정확하게는 은퇴 예정 소식인데, 최근 코로나 사태로 회사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결국은 사업을 정리하게 되어 6월까지만 출근하시기로 했다고 한다. 주가는 왜 이러나 싶게 금새 회복해버렸지만 경제는 엉망이라는 얘기가 계속해서 들리는 와중에, 장인어른이 다니시던 회사도 코로나 사태로 미국 시장이 얼어붙어버린 것을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무려 38년(!)이나 이어온 사회생활을 갑자기 마무리하게 되면서, 장인어른도 장모님도 크게 내색은 안 하시지만 내심 당황하신 기색이다. 월급사장이라고는 해도 사장님이어서 그랬던 것일까, 두 분 모두 장인어른의 은퇴 이후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준비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은데, 그 날이 너무 급작스럽게 닥쳐버렸다. 향후 가격이 오르지 않을까 기대하며 갭투자해둔 작은 아파트를 월세로 돌리면 어떨까, 장인어른 회사 근처의 오피스텔을 구입해서 월세를 주면 어떨까 등의 이야기가 두 분 사이에 오가고,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 중에 금방 감정이 예민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두 분 모두 갑작스러운 큰 변화에 황망함을 느끼시는 것 같다. 어쨌든 긴 세월의 수고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니 기념하는 파티를 열어야겠다고 화제를 돌려놨지만, 이제는 나에게 있어서도 두 분의 노후가 당면한 과제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유튜브에 <대기업 임원 남편이 퇴직하고 벌어진 일>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올라왔다. 채널은 <체인지 그라운드>. 구독은 해놨으나 챙겨보지는 않는 채널인데, 이 제목은 눌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웅이사의 하루공부>라고, 이 회사 대표가 매일(!)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소개해주는 시리즈의 영상이다. 업으로 한다고는 해도 이것만 하는 게 아닌데 매일 이걸 해낸다는 건 정말 대단하다. 나는 주 1권 독서하고 서평 쓰는 것도 쉽지 않던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