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휩쓸 것 같은 사회적인 공포가 어느 정도 지나가고, 정부가 '생활 속 거리두기'로 지침을 완화한 5월, 장인어른의 은퇴 소식을 들었다. 정확하게는 은퇴 예정 소식인데, 최근 코로나 사태로 회사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결국은 사업을 정리하게 되어 6월까지만 출근하시기로 했다고 한다. 주가는 왜 이러나 싶게 금새 회복해버렸지만 경제는 엉망이라는 얘기가 계속해서 들리는 와중에, 장인어른이 다니시던 회사도 코로나 사태로 미국 시장이 얼어붙어버린 것을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무려 38년(!)이나 이어온 사회생활을 갑자기 마무리하게 되면서, 장인어른도 장모님도 크게 내색은 안 하시지만 내심 당황하신 기색이다. 월급사장이라고는 해도 사장님이어서 그랬던 것일까, 두 분 모두 장인어른의 은퇴 이후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준비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은데, 그 날이 너무 급작스럽게 닥쳐버렸다. 향후 가격이 오르지 않을까 기대하며 갭투자해둔 작은 아파트를 월세로 돌리면 어떨까, 장인어른 회사 근처의 오피스텔을 구입해서 월세를 주면 어떨까 등의 이야기가 두 분 사이에 오가고,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 중에 금방 감정이 예민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두 분 모두 갑작스러운 큰 변화에 황망함을 느끼시는 것 같다. 어쨌든 긴 세월의 수고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니 기념하는 파티를 열어야겠다고 화제를 돌려놨지만, 이제는 나에게 있어서도 두 분의 노후가 당면한 과제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유튜브에 <대기업 임원 남편이 퇴직하고 벌어진 일>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올라왔다. 채널은 <체인지 그라운드>. 구독은 해놨으나 챙겨보지는 않는 채널인데, 이 제목은 눌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웅이사의 하루공부>라고, 이 회사 대표가 매일(!)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소개해주는 시리즈의 영상이다. 업으로 한다고는 해도 이것만 하는 게 아닌데 매일 이걸 해낸다는 건 정말 대단하다. 나는 주 1권 독서하고 서평 쓰는 것도 쉽지 않던데 말이지.
차치하고, 내용은 박경옥 작가의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라는 책이다. 28년차 전업주부였던 작가가 남편의 퇴직이라는 큰 변화 속에서 어떤 것을 보고 느끼고 행동했는지를 풀어낸 책인데, 영상의 내용은 책의 주요 내용 소개라 넘어가고 바로 책을 주문해서 읽었다.
박경옥, 2020,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 나무옆의자. |
쉽게 읽히는 책이다. 책의 분류에 대해서는 전혀 조예가 없지만 굳이 분류해보자면 에세이가 아닐까. 자신의 일화와 그로부터 느낀 점, 독자와 공유하고 싶은 점들을 자신이 공부한 내용 - 동양 철학, 동의보감 등 - 을 곁들여 설명해준다. 글도 평이하고, 책도 얇아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실제로 300페이지 조금 안 되는 책인데 총 4시간 안 걸린 것 같다. 물론 애초에 내가 읽으려고 산 책이 아니고 장모님께 드리려고 산 책인데 내용이 어떨까 싶어서 먼저 읽어본 것이라 쓱 훑어본 탓도 있다.
"95% 이상이 남자 본인 입장에서 쓴 터라 아내나 그의 가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렵다. 또한 은퇴를 연구하는 기관에서 나온 책들은 이론적인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 책은 퇴직자 남편과 살아가는 '아내'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 p4.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전업주부의 입장에서 바라본 남편의 퇴직에 대해서 쓰여진 책이라는 점인 것 같다. 저자 스스로도 밝힌 바와 같이, 퇴직자 본인의 입장에 대해서 쓰여진 책은 많고, 퇴직 후 재무 관리라는 관점에서 쓰여진 책도 많지만, 온전히 전업주부로서 가계의 수입은 남편이 전담하는 형태의 삶을 살다가 남편의 퇴직을 맞이한 경우가 책으로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전업주부의 삶이라는 게 그리 편하고 여유있지 않을 뿐더러, 지속적으로 공부를 하고 글을 쓰는 사람 자체도 얼마 없는데다, 그 와중에 경제활동은 안 하고 있으면서 남편이 퇴직해서, 게다가 그걸 소재로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까지 먹어야, 그리고 그걸 결과로 만들어내야 이런 책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전업주부로 살다가 남편의 퇴직을 맞는 분들은 엄청나게 많을 것이 분명하다. 나의 어머니도 그랬고, 장모님 역시도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다가 남편의 퇴직을 맞이하시는 것이다. 동질성은 흥미를 유발하고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좋은 요소이다. 아주 책을 즐기시는 분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책을 펼쳐들 수 있지 않을까.
"책임은 본인이 사용한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두는 것이며 자신의 밥벌이를 하는 것이다. 존중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함을 의마한다."-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 p274.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메시지가 매우 좋다는 것이다. 저자가 스스로의 마음을 관찰하고 반성하고, 스스로의 행동을 변화시킨 것은 정말 배울만한 점이다. 저자도 처음에는 남편이 퇴직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고, 지출을 줄이고 싶어하지 않았고, 돈벌이는 남편의 몫이라는 자기위안 뒤에 숨고 싶어했다. 이러한 마음과 행동의 변화가 항상 자기 관찰과 반성의 결과로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저자가 지난 몇 년을 뒤돌아보고, 글쓰기를 통해 구체화시키는 과정에서 마음과 행동이 더 변하는 과정이 생생히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지속적인 독서와 공부, 커뮤니티와 환경 설정이 갖는 힘이 얼마나 큰 지 책 속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적지 않은 시행 착오를 거치면서,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주제를 찾아서 공부하고, 이를 수입원으로 만들기 위해 시도하고, 무엇보다 꾸준히 해내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나도 은퇴 이후를 걱정하는 개인으로써 저렇게 새로운 것을 찾아봐야지 하는 자극을 많이 받았다.
"내가 일을 하자, 남편도 바뀌었다."-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 p6.
사람은 저마다 상황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다. 내 생각에는 책이 괜찮아도, 장모님께는 나쁜 책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제일 불편하다는 책 선물을 장모님께 해야겠다고 마음 먹는 이유는, 책에서 얘기하듯 가정에서 아내의 힘과 영향력은 어떤 의미에서 남편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두 분이 편안하고 안정적인, 그리고 만족스러운 노후를 보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느끼시는 황망함에서 벗어나 숨을 고르고 주변을 먼저 살피는 여유가 필요하고, 그 첫 번째 행동은 독서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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