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봄 무렵, 나는 책상에 앉아, 죽은 뒤 하고 싶은 말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 p335.
별 이유 없이 자기 계발서를 싫어하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와 닿지 않던 말 중에 '내일 세상이 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는'다든지, '내일 당신이 죽는다면 오늘 하고 싶은 일을 지금 당장 하라' 따위의 말들이 있었는데, 딱 드는 생각은 '어쩌라고' 였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결국 현재에 충실하기 위해 끝을 생각하라는 거였는데, 도무지 끝을 떠올릴 수도, 현재에 충실하라는 게 어떤 건지도 실감할 수가 없었다.
십수년이 지나 정말 그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열심히 살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인생의 끝이라는 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머리로는 삶의 유한함을 알고, 시간의 부족함을 아쉽게 느끼고, 문득 돌아보면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실감하지만, 그래도 어떤 형태로든 죽음이라는 것을 실감하지는 못한다.
'모든 것이 기록되는 디지털의 시대에 죽음이란 남겨진 사람 혹은 죽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렇게 열심히 사는 와중에 재미 있는 책을 읽었다. 디지털의 시대에 죽음이란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누구나 디지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다양한 디지털 발자국을 남기고, 한계비용이 극도로 낮아진 상황에서 이 발자국들은 발자국 주인의 생사와 무관하게 오래도록, 혹은 영원히도 남는다. 발자국의 주인이 생물학적으로 죽었을 때, 남겨진 사람들 - 가족이나, 온/오프라인 친구, 지인들 - 이 고인을 기억하는 방식 또한 영향을 받는다. 전통적으로 고인의 유산에 대한 접근 권한과 통제 권한을 부여받았던 가족들은 더 이상 그 권리를 자동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오히려 그 권한은 고인이 생전에 디지털 세계에서 가까웠던 친구, 혹은 그 플랫폼을 운영하는 기업이 가진다.
점차, 그리고 이미 생각보다 더 빠르게 생활 반경이 온라인으로 옮겨가는 시대에, 누군가의 죽음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다양하고 강렬한 감정을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크고 복잡한 문제인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나에게는 번거로워서 관리하지 않는 페이스북 타임라인이 이미 십년도 더 전부터 '자서전'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운영되고 있었고, 누군가는 개인적인 기록물들을 쌓아가고 있으며, 누군가는 이미 생전의 기억을 담은 추모공간이 되었다는 사실은 상당한 지적 자극이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디지털 유산 같은 건 사실상 내 관심 안에 들지 못할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 p334.
책을 읽어가는 내내 나도 내 디지털 발자국들을 큐레이팅하는 데 시간을 들이고, 이게 유산이 되었을 때 남은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도록 관리해두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이 충동을 결국 실행으로 옮기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도 강하게 받았다. 책에서 소개되는, 즉 이야기가 되는 사례들에는 공감할 수 있었지만 이어지는 주장과 제언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겼다.
단순히 죽음을 너무 먼 얘기로 생각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책에 소개된 사례 중 질병으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현재에 집중하면서 온라인 상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루시 왓츠라는 여성에게도 자신의 사후에 남겨질 메시지를 작성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저자 또한 비슷한 감상을 밝힌 바 있는데, 우리가 남길 디지털 유산들은 현재에 집중한 결과인 것이지 유산을 남기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물론 이들의 경우가 현재에 집중하는 것인 반면 내 경우는 현재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어쨌든 나의 생물학적 죽음 이후를 따로 준비하는 게 그다지 쉽지 않다는 점은 명백한 것 같다. 그러니 일단 열심히 살고, 그 결과로 하나하나 찍히는 내 디지털 발자국들의 정리도 조금씩은 신경을 써봐야겠다.
평소에도 신경쓰고 있는 주제니, 마스터 패스워드 체계를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하면 되려나.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