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생각이 좋다고 좋은 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존 리, 2020, 존리의 부자되기 습관, 지식노마드

<부자는 알지만 가난한 사람은 모르는 것>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을 통해 존 리라는 사람을 처음 알았다. 쇼핑몰을 통해 돈 잘 버는 법으로 시작해, 최근에는 이런저런 주제에 대한 인터뷰 영상을 올리는 <신사임당>이라는 채널에 올라온 영상이었는데, 원래도 내가 주식에 대해 갖고 있던 모호한 관점을 더 직설적이고 과감하게, 말인즉슨 명확해 보이게 주장하는 인터뷰이가 제법 인상적인 영상이었다.
 이 영상을 계기로, 또 이 영상 즈음에 유튜브 피드에 이 사람이 제법 노출되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영상들을 두어 편 보고는 최근의 저작인 이 책을 덜컥 사버렸다. 책도 얇고, 내용도 대체로 익숙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여행이라도 가게 되면 호텔 방에 앉아서 가볍게 읽으면서 내 투자관을 점검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상당한 고통이었던, 그리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사회적 거리두기'의 중간에 석가탄신일로부터 어린이날에 이어지는 징검다리 연휴가 시작됐다. 코로나19에 대한 방역이라는 한 가지 관점만으로 바라보자면 결코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지만, 아내와 나는 짧은 여행을 계획했다. 어린이집이 무기한 휴원하는 동안 아이를 혼자 감당하시느라 지쳐가는 장모님으로부터 아이를 떼어 놓는 한편, 한 동안 찾아뵙지 못한 부모님도 찾아뵙고, 아이가 집에 없는 두 달 동안 격무에 시달린 우리에게도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본가와 호텔에 2박씩을 하던 하루, 격렬히 놀고 장렬히 전사한 아이를 옆에 두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예상했던대로 얇고 쉽게 읽히는 책이었기 때문에 대략 한 시간 반 정도 걸려서 다 읽었다. 올해 독서 목표 50권 중 한 권을 읽는 성과를 거뒀지만... 남은 건 없었다.

산출물에 대한 자본의 기여를 인정하는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고, 돈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위해 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십분 동감한다. 나 또한 돈이 벌어오는 돈이 내가 버는 돈의 상당 부분을 대체하는 날을 주요한 재무 목표로 두고 있으니까.
 우리나라의 낮은 금융 이해도가 위기이자 기회라는 말에도 동의한다. 특히 앨런 그린스펀이 언급한 '생존을 위협하는 금융문맹'이 개인에게 있어서 특히 노후의 생활을 위협하기 때문에, 저자가 이 금융맹 - 저자는 금융문맹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나는 이 표현이 더 익숙하고,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 을 타파하기 위해 펼쳐 온 수많은 강연 등의 활동에는 응원하는 마음을 갖는다.
 다만 나에게 있어서 문제는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이나 관점이 없었다는 것이다. 딱히 경제라는 시스템이나 금융이라는 도구, 재테크라는 기법 등에 빠삭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지난 몇 년의 고민과 공부의 결과로 최소한 금융맹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금융맹을 몰아내기 위해 분투한 기조 그대로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타겟으로 너무나 쉬운 책을 쓴 것이다.

금융이라는 영역에서 저자의 수준은 독자인 나에게는 아득히 높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저자의 책을 사 읽을 때 기대하는 것은 그 높은 수준의 일부라도 엿볼 기회를 얻기 위함인데, 이번 책은 저자가 설정한 독자의 수준이 너무 낮았다. 이 불일치가 나에게는 이 책을 나쁜 책으로 만들어버렸다.
 정말로 오랜만에 책의 선정에서 실패를 경험했다. 최근 몇 년은 신뢰할만한 소스로부터 추천 받은 책만 읽었기 때문인데, 큐레이션이라는 것이 어떤 가치를 갖는지 체감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책과 같이 소비를 위해 시간을 들여야 하고, 그 결과로 지식과 관점을 얻는 분야는, 누군가 좋은 책을 골라주는 것만큼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내가 구독하는 몇 안되는 유튜브 채널인 <독서연구소>와 <홍춘욱의 경제강의>를 통해 소개되는 책들을 주로 봐왔는데, 다시 한 번 이런 정보를 무료로 나누는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나에게는 좋지 않은 책이었지만, 이 책 자체가 나쁜 책이라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아마도 목표로 했을 금융맹 언저리에 계신 분들 혹은 중학생 정도라면 자본주의와 금융, 돈이라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기에 괜찮은 책이 아닐까. 저자의 관점이 다소 편향되어 있지 않나 하는 우려는 있지만, '부자'나 '돈'에 대해 경원시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에게는 적절한 반대편 균형추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저자가 책에서 지적하는 '돈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라는 것이 있는 사람들에게 과연 '존리의 부자되기 습관'과 같은 제목이 어필을 할 수는 있는 것일까? 데이터가 없기에 제대로 판단을 해볼 수는 없지만,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문득 이런 걱정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저자의 바람대로 더 많은 사람들이 금융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는 날이 오면 좋겠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6살짜리 아이에게 지수 개념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내 6살짜리 아이에게 얼마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큰 수는 '백천무한'이었다. 아직 하나하나 차근차근 세어 나가면 100 넘게도 셀 수 있긴 하지만, 여전히 68 다음은 뭐냐고 물으면 '13?' 이렇게 아무 숫자나 생각나는대로 얘기하는 게 아이의 수준인데, 백 다음에는 천이 있고, '무한'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는 걸 어디서 줏어들은 모양인지, '엄청 많다'는 얘기는 모두 다 '백천무한개'로 퉁치던 게 불과 한두달 전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녀석이 '조'라는 게 있다던데, 이러면서 또 아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파온다. '억'이라는 단위가 있는 줄도 모르는 아이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나? 일단 '만'과 '조' 사이에는 '억'이라는 게 있다고 설명은 해 줬는데, 사실 '만'과 '조' 사이에는 '억' 말고도 '십만', '백만', '천만'도 있고, '십억', '백억', '천억'도 있으며, 조 다음도 같은 모양이로 계속 늘어난다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해주면 되지? "또한 우리는 모두 머리 속에 일종의 숫자 선, 즉 마음 속 숫자 축을 갖고 있어, 계산할 때 그 축 위에서 움직이는 법을 배운다." - 우리의 뇌는 어떻게 배우는가, p208. 나름 고등교육을 받아서, 실수 축과 허수 축, 도메인 전환과 같은 개념을 섭렵한 아빠와 달리 이제 6살인 아이는 실수 축에서 정수, 그 중에서도 자연수 영역의 일부에 대해서 이런 심상을 만들어가야 하는 단계인데, 여기서 1씩 세기로 가기에는 억이니 조니, 너무나 험난한 영역의 얘기인 것이다. "놀랍게도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2차원 지도상에서 데이터를 나타내는 걸 배울 때 이 영역이 활성화된다. 그 데이터가 공...

외국보다 한국 초코파이가 초코 함량이 더 높은 이유

여느 몹쓸 공돌이 개그  언젠가 돌아다니던 초코파이 초코 함량 계산식. 답은? 무려 약 31.8%다. 이 정도면 빈츠보다도 높은 함량일지도.. 자고로 무릇 공대생 혹은 공돌이라 하면 '일반인' - 여기서는 비 공대인 -이라면 알 필요도 없는 기호로 범벅이 된 수식을 붙들고 밤을 샌다든지, 거기서부터 파생된 온갖 과제를 하느라 밤을 샌다든지,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들끼리' 머리를 싸메고 수시로 밤을 새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밤을 샌다는 건 낮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고 곧 '일반인'들과의 소통의 기회가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다보면 시나브로 쌓이는 전공 지식과 함께 '바깥 세상'에 대한 환상 그리고 '일반인'들과의 유머적 단절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씩 키우게 되는데, 이런 것들을 비틀어 탄생한 것이 공대 개그 혹은 공돌이 개그이다. 예를 들어 '외국보다 한국의 초코파이가 초코 함량이 더 높은 이유'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면 당신도 훌륭한 공돌이일 가능성이 높은데(힌트는 위 수식을 영어로 바꿔보라는 것이고, 답은 마지막에..), 무릇 공돌이라 하면 이렇게 공돌이를 위한 개그를 이해하고 웃을 수 있는 소양을 갖추게 되고, 일반인들은 해설이 있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개그까지도 즐기면서 모종의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에, 다시 일반인들과의 유머적 단절은 더 공고해진다. 이런 거에 웃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다. - 출처: 나무위키 ' 공대개그 ' 페이지. 나 또한 정통한 공돌이로서 - 입사 전까지 같은 건물에 10년을 들락거렸다! - 유사한 과정을 거쳤고, 일요일 밤을 지배하던 주류 개그는 1도 모르지만 각종 공돌이 개그에는 피식거리는 단계에 도달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이런 상황에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질량이 없는 물질'만 만날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 날로 있는...

더 이상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 "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 김영사, 2001. 하도 오래 전이라 확신은 없지만, 시작은 이 책이었던 것 같다. '깨어있음' 혹은 '알아차림'이라는 개념을 마음 한 구석에 가지기 시작했던 것은. 거의 20년 전에 - 출간년도를 확인해보니 2001년이다 - 읽었던 책이라 각론이든 총론이든 아무 것도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표지 사진 속 아이의 얼굴과, 무엇을 하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상태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개념만은 기억 속에 박혀 있었다. 이 '알아차림'이라는 개념은 시간이 흘러 '마음챙김(mindfulness)'이라는 개념으로 다시 다가왔다. 어떻게인지는 모르겠지만 페이스북 알고리즘이 나에게 마음챙김 운운하기 시작한지도 몇 년은 된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고 스스로 더 나아지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읽은 많은 책에서도, '명상' 혹은 '마음챙김'의 혜택을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위 비판적인 사고를 하는 나는, 적극적으로 마음챙김을 실천하기 위해 시간을 내기에는 그 혜택이 명확하지는 않은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며 적극적으로 마음챙김 수행 혹은 명상이라는 것을 시도해보지 않았다. 핑곗거리를 잃어버리다 샤우나 샤피로, " 마음챙김 ", 안드로메디안, 2021. "심리적, 인지적, 신체적 건강 영역에서 마음챙김 수행의 중요한 이점을 확인해준 연구는 수 없이 많다." - 마음챙김, p81. 이건 뭐 '닥치고 해봐야 되는' 수준이다. 이렇게나 다양한 혜택이 수많은 연구결과를 통해 뒷받침되고 있을 거라고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책에서 소개한 이점들에 붙어 있는 참고문헌과 각 인용 수 및 수록된 저널의 영향력 지수 를 정리해봤다(인용은 Google Scholar 검색시점 기준, 영향력 지수는 Wikipedia 기준). 내가 이걸 왜 시작했지...ㅡ.ㅡ; 심리적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