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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본다고 해서 아는 것은 아니다

온 몸의 피부가 벗겨진다는 것

이탈리아 밀라노 두오모의 성 바르톨로메오 입상. 전신 피부가 벗겨지는 형벌을 당해 순교했으며, 몸에 두르고 있는 게 자신의 가죽이다(!). 2015년 여행 중 촬영.

온 몸의 피부(혹은 가죽)이 산 채로 벗겨지면 어떤 느낌일까? 자극적인 영상 매체에 종종 등장하는 소재인데, 살짝 상상만 해봐도 끔찍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누군가 손발이 잘려나가는 고통을 겪고 있어도, 내 손에 생긴 생채기가 더 고통스러운 것이 사람인지라, 솔직히 이 고통을 내가 제대로 이해할 방법은 없다. 혹시라도 그런 기회가 있다면? 진심으로 그런 일은 없었으면 한다.

2015년에 이탈리아 밀라노 두오모에 갔을 때다. 아무런 배경지식도 없이 그냥 대성당의 규모에만 감탄하면서 내부를 구경하고 있던 차에, 성 바르톨로메오 입상을 봤다. 멀리서 봤을 땐 '왠 대머리 아저씨가 삐딱하게 서 있나?' 이런 느낌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갔을 때는 근육이 쫙쫙 갈라져 있는(!) 근육남이 중요한 부위만 거적데기 같은 걸로 가리고 서 있는 줄 알았다. 더 가까이 가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성당에 왠 해부학 모형 같은 걸 뒀지?'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입상의 뒤로 돌아가서 거적데기의 정체를 안 순간,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손가락, 발가락, 얼굴모양이 선명한 거적데기라니! 알고 보니 대머리 아저씨의 정체는 성 바르톨로메오였고, 가톨릭 박해 때 온 몸의 가죽이 벗겨지는 형벌을 당해 순교하셨다고 한다.

"살아 있는 사람의 피부를 산 채로 벗기는 섬뜩한 일이 벌어지는 경우 희생자가 느끼는 고통은 탈수에서 비롯된다."
- 피부는 인생이다, p26.
어떤 고통이었는지를 이해할 방법은 여전히 없지만, 그 고통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는 5년이 지나서 이해할 수 있었다. 탈수. 마찬가지로 생명을 위협하는 탈수의 고통을 느껴볼 기회는 내 삶에 없었으면 한다. 하지만 피부가 벗겨지면 단순히 엄청 쓰라리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 솔직히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다;; - 엄청난 속도로 탈수가 진행되면서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숨에 죽는 것은 아니니까,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을 수준까지 탈수가 진행되는 동안, 끔찍한 고통과 함께 돌이킬 수 없이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절망적으로 생생하게 느끼게 되겠지.
 온 몸의 피부가 벗겨지는 경험이라니, 이제는 궁금하지도 않다.

눈으로 본다고 해서 아는 것은 아니다

몬티 라이언, 2020, 피부는 인생이다, 브론스테인.

이 책을 보며 밀라노 두오모에서의 경험을 돌이켜보니, 우리가 모르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무지에 대한 무지니 메타무지라고 하면 될까?
 뇌피셜일 뿐이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것 같다. 입자물리학이 다루는 미시 세계나 천체물리학에서 다루는 거시 세계처럼, 너무 작거나 너무 커서 경외감마저 느껴지는 영역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을 쉽게 인지하고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나 정치나 문명과 같이 왠지 내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는 충분히 안다고 착각하고, 뭘 모르는지조차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복잡계라는 게 이해하기가 더 어려운 게 아닐까 싶다. 세상은 눈에 보이지만 그 돌아가는 원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대충 때려 맞추기 좋게 선형적이지도 않으니까.

"매일 씻고 화장품을 바르면서 거울로 자주 쳐다보기야 하겠지만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있는지 그리고 '감탄'한 적이 있는지 묻는 것이다."
- 피부는 인생이다, p19.
우리의 몸에 대해서는, 대체로의 관심은 겉에서는 보이지 않는 몸 속에 쏠리고, 반면 눈에 훤히 보이는 피부에 대해서는 그냥 거기 있는 것, 없으면 허전하니까 둘러져 있는 것 정도로 치부하는 것이 이에 해당하겠다.
 피부는 인체를 외부의 수많은 자극으로부터 보호하고, 체액이 소실되지 않도록 가둬두며, 촉감을 통해 세상을 인지할 수 있게 해 주고, 몸 속의 문제를 알려 주고, 사회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등 수많은 기능을 한다. 그리고 이에 걸맞게 약 9킬로그램의 무게, 2제곱미터의 면적을 차지하는 인체에서 가장 큰 기관이다. 성 바르톨로메오가 괜히 자신의 피부를 거적데기처럼 온 몸에 두르고 있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과학은 우리가 피부를 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우리 자신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피부에는 아직 탐구할 거리가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
- 피부는 인생이다, p48.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얘기했던가? 모른다는 걸 알고 인정하는데서부터 과학혁명이 시작됐다. 모른다는 걸 알아야 알기 위한 노력을 함으로써 더 알게 되는데,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메타무지가 높으면 알기 위한 노력조차 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피부에 대한 메타무지를 낮춰주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는 책이다.저자가 책에서도 얘기하듯이, 피부라는 조직은 너무 크고 많은 기능을 담당하며 과학적인 연구가 막 시작된 단계인데다, 개인의 신체적인 영역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신적으로도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여전히 알아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기관이다. 따라서, '피부에 대한 모든 것'을 기대하고 이 책을 펼치면 반드시 실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간 간과해온 피부라는 기관에 대해서 흥미를 갖고, 이 기관이 얼마나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지 알고, 현대 과학이 피부에 대해 밝혀낸 것과 아직 밝혀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도 실생활에 접목할 수 있는 팁부터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무지에 대한 인지 등 수 많은 혜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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