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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와 소음

골전도 이어폰과 신분당선

AfterShokz Air. 출처는 제조사 홈페이지.
이런 게 골전도 이어폰이다. 차마 내 착용 샷을 올릴 수는 없고, 출처는 제조사 홈페이지.

아이를 키우다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겪는 경우가 있다.

내 경우는 명절에 끝없이 반복되는 동요를 배경음악 삼아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경우였는데, 장거리 운전으로 피곤하고 졸린 와중에 자기 듣는 동요를 끄기라도 하면 땡깡을 피우는 아이 때문에 정말 진지하게 안전한 도착을 걱정했던 적이 있었다. 또 이런 일이 벌어질 때, 아이에게는 카오디오로 동요를 틀어주더라도, 나는 내 관심사인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갈 방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운전 중에 커널형 이어폰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 길로 내 기준으로는 정말 거금을 들여 골전도 이어폰이란 걸 장만했다.

골전도 이어폰이란 귓구멍을 통하는 대신 그 옆의 뼈를 통해 소리=진동을 내이로 전달해주는 물건이다. 애초에 귀를 막지 않는 게 목적인 물건이니만큼, 운전 중에 카오디오를 어떤 이유로든 못 쓰는 사람이 사용하기에는 이만한 게 없다. 이 골전도 이어폰은 운전 중에 아이에게 들려주는 동요와 내가 듣는 팟캐스트를 분리해준 것으로 충분히 몫을 했을 뿐만 아니라 코로나19 사태로 급증한 웹 컨퍼런스에서도 요긴하게 사용했는데, 귀가 열려 있어서 커널형 이어폰에서 발생하는 울림으로부터 자유로운 점이나 내 목소리를 평소 내가 듣던대로 들을 수 있는 점이 나에게는 큰 장점이었다.

반면에 골전도 이어폰의 단점 또한 귀가 열려 있다는 점에서 오는데, 주변 환경이 시끄러운 경우 이를 차단해주는 기능이 없기 때문에 내가 들으려고 하는 음악이나 상대방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특히 출퇴근 시에 한 번씩 이용하는 신분당선의 양재시민의숲 ~ 청계산입구 구간이 이 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환경을 만들었는데, 긴 직선구간에서 신분당선이 자랑하는 최고 속도 - 아마 90km/h였던 것 같다 - 로 주행할 때의 소음이 너무 커서 이어폰 볼륨을 최대로 높여도 팟캐스트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럴 때는 결국 골전도 이어폰을 낀 상태로 커널형 이어폰을 귀마개로 활용하거나, 커널형 이어폰을 사용하거나, 어쨌든 이어폰을 꺼내기가 너무 귀찮을 때는 손가락으로 귀를 막는 수밖에 없었다.


로그의 세계

"건강한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소리는 국제 협정에 따라 0dB로 지정되었다."
<볼륨을 낮춰라>, p68,

'데시벨’이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dB’라는 기호로 표현되는 데시벨은 어떤 기준치 A 대비 B의 비율을 나타내는 단위로, Wikipedia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수식이라면 일단 두드러기가 나는 분들도 있겠지만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만약 B가 A와 같다면, 즉 기준치와 동일한 값이 B의 데시벨 값은 0dB이다. 그리고 10배라면 10dB, 100배라면 20dB, 이런 식으로 10배 증가할 때마다 10씩 증가하는 개념이라고만 이해하면 된다. 소리에 대해서라면 이 A 값이 '건강한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소리’로 정의되어 있어 0dB의 기준값이 되는 것이고, 이 값 대비 10만배 큰 소리가 50dB가 되는데 이는 일상적 대화 정도에 해당한다.

"지속적 노출에 대한 데시벨 위험선은 보통 85에서 90dB이다. 이는 들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소리의 약 10억배…"
<볼륨을 낮춰라>, p70.

‘일상적 대화’ 수준조차도 '건강한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소리’의 10만배(!) 큰 소리다. 지속적 노출에 대한 위험선이라고 하는 90dB 수준이 되면 1 뒤에 0이 9개 붙은 개념이니까, 10억배라는 계산이 나온다. 선형적으로 그려서는 답도 안 나오는 스케일이다. 혹시라도 감이 안 온다 하면 시험삼아 종이에 선을 긋고 0부터 1(0dB), 10(10dB), 100(20dB), 1000(30dB)까지만 표시해보자. 이런 스케일의 값을 다루기 위해 있는 게 '데시벨’이라는 단위이고, 이런 식으로 데이터를 표기할 때 '로그스케일(log-scale)'을 썼다고 하는 것이고, 로그를 통해 구간을 압축해서 봐야 하는 세상을 '기하급수적’이라고 표현한다.

스마트폰 어플로 측정한 별다방 소음 레벨.
60dB 수준으로 '일상 대화' 수준이라고 하는데, 과연?

참고로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별다방에서 부정확하나마 스마트폰 소음 측정 어플로 측정한 소음 정도가 약 60dB,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왕복 8차로 옆을 지나면서 차들이 지나갈 때 측정한 소음 정도가 평균적으로 70~75dB 수준이었다. 엄밀하게 측정된 값은 아니지만 구글에서 '소음 기준’을 검색했을 때 60dB가 일상 대화, 70dB가 도로나 시끄러운 사무실, 80dB가 지하철 소음 정도로 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얼추는 비슷하게 보면서 10dB 정도는 보수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솔직히 별다방 안이면 시끄러운 사무실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고, 왕복 8차로 변에서 듣는 자동차 소음도 내 골전도 이어폰으로는 제대로 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수준이다).

아무튼 내가 골전도 이어폰의 볼륨을 스마트폰이 청력 유해성 경고를 띄우는 레벨을 훌쩍 넘겨 최대치로 설정해도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신분당선의 소음 레벨은 아마도 계속 들어 좋을 것은 없는 수준에는 충분히 도달하지 않을까 싶다.


신호와 소음

'신호 대 잡음 비(Signal-to-Noise Ratio, SNR)'라는 개념이 있다. 예를 들어 시끄러운 식당에서 일행과 대화를 한다고 해 보자. 이 때 일행의 목소리는 '신호’가 되고, 식당의 소음은 '잡음’이 되는 것인데, 이 신호가 잡음 대비 얼마나 강한지를 역시 데시벨이라는 단위로 나타내는 것이 이 SNR이다. 나는 통신쟁이니까 여기서 잡음은 안테나 소자에서 발생하는 열잡음이고, 핵심적인 방해요소는 간섭(Interference)으로 따로 모델링해서 SINR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게 더 익숙하지만, 소리에 대해서 일반적임 얘기를 할 때는 잡음과 간섭은 그냥 '소음’으로 퉁치면 되겠다.

이 개념이 왜 중요하냐면, 결국 내가 들으려고 하는 소리인 신호가 그 외 소리인 소음보다 의미 있는 수준으로 커야 된다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신호를 인지하는 우리 뇌의 능력이 어느 정도의 SNR에서 신호를 잡아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10dB 정도면 집중했을 때 알아는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20dB에서 30dB 정도면 신호가 소음을 뚫고 제법 선명하게 들릴 것 같다.


"하지만 단연코 가장 큰 원인은 시끄러운 소리에 대한 지나친 노출이다."
<볼륨을 낮춰라>, p67.

이 레벨이 얼마인지보다 중요한 건, 어쨌든 소음이 큰 환경에서 필요한 청각 정보를 얻으려면 그 신호의 세기가 소음보다 더 커야 할 수 있다는 점이고, 큰 길가를 지날 때나 신분당선을 타고 이동할 때 필요한 수준의 SNR을 얻기 위해 내 골전도 이어폰의 볼륨을 높이는만큼 그 신호가 내 청각을 손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소리가 나에게 있어 신호인지 소음인지는 청각의 손상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 모든 안 좋은 소식들을 우리가 갖고 태어난 귀가 우리가 가진 유일한 귀라는 사실로 인해 더욱 심각해진다."
<볼륨을 낮춰라>, p13.

현재의 내 청각이라는 것은 앞으로 조금씩 손상되면서 떨어질 일만 남은 소중한 자원이다. 소음이 가득한 환경에서 소음을 뚫고 신호를 듣기 위해 키운 신호가 내 청각을 손상시키게 두는 것보다는 내 귀로 들어오는 소음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약한 신호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그들은 보청기가 자신들이 진짜로 관심을 두는 일, 즉 더 잘 들리게 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화를 낸다."
<볼륨을 낮춰라>, p190.

"그래서 보스는 히어폰의 홍보 자료에 청력 손실에 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대신 소음방지 기능을 강조하며 히어폰을 "시끄러운 환경에서 좀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특별히 고안되어, 소음이 많은 곳에서의 대화를 더 쉽고 편하게 만들어 주는 대화 강화형 헤드폰"으로 설명한다."
<볼륨을 낮춰라>, p242.

‘좀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기계를 '보청기’라고 한다. '대화 강화형 헤드폰’이라니, 굳이 이런 카테고리에 제품을 포지셔닝해야 할 만큼 이권이 걸린 시장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지만, 이 얘기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액티브 노이즈 캔슬링과 지향성 마이크 어레이 기술을 활용해서 소음과 신호의 레벨을 제어해주는 기계는 청각이 이미 상당부분 손상된 사람에게도, 이제부터의 청각 손상을 걱정하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미 청각이 손상되었다면 더 높은 SNR을 실현해내야 한다는 것이 차이일 뿐이다.

당장은 조금 귀찮더라도 커널형 이어폰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거나 - 밀폐형인만큼 귀로 들어오는 내부 소음을 줄여준다 - 골전도 이어폰과 함께 귀마개를 사용하는 것이 대안이 될테지만, 지금부터 보스 사의 히어폰을 포함해 대화 강화형 헤드폰 - 이라 쓰고 보청기라 읽는다 - 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


데이비드 오언, “볼륨을낮춰라”, 브론스테인, 2021.

"소음 속에서 들리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러한 문제는 특정 나잇대 이상의 사람에게 거의 일반적인 문제이다."
<볼륨을 낮춰라>, p41.

긴 기대 여명이 저주가 되는 것은 비단 재무적인 문제만이 아닌 것 같다. 청각을 잃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을 생각해보면, 나이가 들면서 특히 내가 혹사시킨 주파수 대역 - 아마도 말에 관련된 - 에 대한 청각이 무뎌질수록 다른 사람과의 관계 또한 멀어질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 때까지 과학이 손상된 털세포나 청각 신경으로의 시냅스 연결을 복구시킬 방법을 찾아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학이 길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게 대중화대기 전까지는 일단 조심하는 게 상책인 것 같다.

왜 이게 상책인지 좀 더 비판적으로 생각해보고 싶다면 데이비드 오언의 "볼륨을 낮춰라"를 읽자. 청력이란 손상되기만 할 뿐 회복되지 않는 능력이고, 청력을 잃는 것이 진사회성 동물인 사람에게 있어 어떤 의미이며, 현 시점에서의 최선의 선택은 청력을 보존하는 것 뿐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갖고 태어난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귀를 조금 더 소중히 여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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