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런다.
처음 책을 읽을 때, 연신 '기가 막히네!'를 내뱉으며 온 페이지에 마구 밑줄을 그어대며 읽긴 하는데, 챕터 두 개 연달아 읽기가 어렵고 걸핏하면 핸드폰에 손이 가곤 했다. 입사하고 처음 연달아 일주일을 쉬는데 어디 여행도 안 가서, 에어컨 튼 거실 소파에 혼자 자리잡고 앉아 몇 시간씩 독서에 부을 수 없었다면 다 읽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제 서평을 쓰려면 책을 훑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글감을 잡아가야 되는데, 아니나다를까 온통 딴 생각 뿐이고 생각이 정리가 안 된다.
나름 한 해에 30권 이상씩은 책을 읽고 서평을 쓴지도 몇 년 되어서, 괜히 욕심 부리다 글이 산으로 가는 경우는 있어도 책을 읽는데 이렇게 산만해지는 경우는 없었는데 환장할 노릇이다.
앨자베스 스탠리, "최악을 극복하는 힘", 비잉, 2021.
문제의 책은 이런 예쁜 표지에 <최악을 극복하는 힘>이라는 다소 심각한 제목이 붙어 있는데, 원제는 <Widen the Window>, 즉 '창을 넓혀라'이다. 여기서 창이란 '인내의 창'으로, 스트레스를 다루면서 현실에 머물고 최적의 수행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을 말한다. 이게 넓을수록 스트레스를 적절히 다루면서 그 에너지를 이용해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고, 상황이 종료되고 스트레스로부터 완전히 회복할수록 이 창이 다시 넓어진다.
또 어린 시절 직계가족 외의 지인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적 학대, 스토킹, 수차례의 폭행, 강간을 당했는데 대부분 대학 입학 전에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 최악을 극복하는 힘, p29.
스트레스만 얘기하면 별 것 아닌 느낌이지만 이 책은 스트레스의 연속선상에 존재하는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깊게 다루는데, 저자 소개를 보면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엄청난 일을 겪었다! 책에서 저자는 스스로 심각한 트라우마와 그로 인한 온갖 문제들로부터 스스로 회복하고,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비슷한 일을 겪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운영하면서 얻은 방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스트레스와 우리의 심신체계 - 말 그대로 '몸'과 '마음'이 이루는 시스템이다 - 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스트레스 상황에서 완전히 회복되는 경험을 반복함으로써 인내의 창을 넓히는 수행 방법을 소개한다.
심신 체계에서 다양한 증상을 구성하는 스트레스 각성은 우리가 에너지를 동원해 위협이나 도전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 최악을 극복하는 힘, p124.
책에 따르면 스트레스란 단기간의 생존을 위해 우리의 심신 체계가 일시적으로 끌어올리는 에너지다. 당면한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기전인만큼, 당연히 소화나 수면이나 성장과 같은 장기적인 목적에는 자원이 배분되지 않는다. 따라서 만성적으로 스트레스를 통해 에너지를 끌어올린 상태가 유지되면, 각종 장기적인 문제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이 때 스트레스를 통해 집중된 에너지를 적절히 배출하고, 우리의 뇌가 '안전하다'는 것을 인지하면 우리의 스트레스 반응 체계가 더 원숙해진다.
이 때 '위험'을 인지해서 스트레스를 동원하고 '안전'을 인지해서 다시 이를 해소하는 역할을 하는 뇌를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는 '사고 뇌'와 구분하여 '생존 뇌'라고 한다. 그리고 이 생존 뇌가 위험을 인지하는 체계를 '신경지'라고 하는데, 사고 뇌는 신경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생존 뇌는 언어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스트레스로 인한 문제를 과소평가하거나, 때때로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생각이 멈춰버리는 등 사고 뇌와 생존 뇌의 대립 관계를 경험한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사회참여와 동결은 동시에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최악을 극복하는 힘, p131.
스트레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3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사고 뇌가 주도하고 인내의 창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사회참여 체계'가 1단계, 스트레스를 통해 끌어올린 에너지를 활용하여 위험과 맞서거나 위험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투쟁-도피 반응'이 2단계, 마지막으로 생존 뇌가 모든 저항을 포기하는 '동결 반응'이 3단계이다.
마지막 동결 반응은 우리가 인내의 창 밖으로 벗어났을 때만 사용할 수 있고 따라서 1단계 반응과 같이 사용할 수 없데, 이 창이 좁을수록 1단계 반응보다는 2, 3단계 반응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현대 사회에서 투쟁이나 도피, 혹은 동결 - 죽은 척하기 - 이 필요한 상황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자문해보면 우리가 인내의 창을 넓혀야 한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그러므로 완전히 회복해 인내의 창을 넓히려면 인지적, 정서적, 신체적 세 가지 차원에서 모두 스트레스와 트라우마 경험을 처리하고 마무리해야 한다.
- 최악을 극복하는 힘, p366.
인내의 창을 넓히기 위해서는 스트레스 반응과 이로부터의 완전한 회복을 반복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 때의 회복은 사고 뇌가 아니라 생존 뇌가 담당하기 때문에 의지를 다지거나 괜찮다고 되뇌이는 등 사고 뇌가 주도하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책에서 소개하는 마음챙김 기반 마음 단련 훈련(Mindfulness-based Mind Fitness Training, MMFT)은 사고 뇌에도 생존 뇌에도 속하지 않는 자각을 이용해 생존 뇌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가능성을 높임으로써 회복 과정을 유발하는데, 그 기본 훈련법인 G&R(뭐였는지 까먹었다)은 보통 호흡에 집중하는 마음챙김 수련방법과 달리 흔들림 없는 바닥에 닿아 있는 부위의 감각에 집중한다.
많은 경험적 연구에서 감정을 다루는 데 표현적 글쓰기의 장점이 입증됐다.
- 최악을 극복하는 힘, p446.
각자가 살아온 환경과 이를 경험하고 반응한 바는 온통 제각각이므로, 이런 훈련 방법 자체보다도 오히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살피는 것이다. 책에서는 '성찰적 글쓰기'와 '비판단적 호기심'을 강조하는데, 찬찬히 내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트라우마 사건이 있었는지, 당면한 스트레스 요인은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럴 때의 감각은 어떤지 등을 알아차리고, 기록하고, 판단하려 애쓰지 않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 개념 자체가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포용하는 포괄적인 마음챙김의 기본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는 동안 느꼈던 괴리감도 내 사고 뇌와 생존 뇌가 서로 다른 판단을 한 것을 내가 자각한 것일 수 있고, 나도 모르는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이 그 밑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별 다른 어려움 없이, 소위 유복하게, 그리고 굴곡 없이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나에게도 트라우마라 할만한 게 분명히 있을 것이다. 찬찬히 자신을 돌이켜보며 성찰적 글쓰기를 해나가다보면 분명히 찾아낼 수 있을 것이고,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영성 작가의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본 독서의 방법 중 참 매력적이지만 언제 해볼 수 있을까 했던 게 '만독(느리게 읽기)'인데, 이번 책과 서평 덕에 이 책과 함께 내 인생을 느리게 읽어나가보자는 목표를 가지게 됐다.
분명 두껍고, 쉽지 않은 내용이 가득하며,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는 책이라 누군가에게 선뜻 권하기 쉽지 않은 책이다. 하지만 책이 담고 있는 많은 근거들과 사례들과 함꼐 자신의 내면을 책과 함께 찬찬히 읽어나가다보면 정말로 근본적인 어떤 혜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쉽게는 아니지만 강하게 일독을 권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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