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서든, 과학에서든, 혼자서 하든, 팀을 이루어서 하든, 디테일과 씨름하며 심혈을 기울이는 작업은 솟구치는 상상력과 용기 있는 우상파괴적 행동만큼이나 필수불가결한 부분일 것이다."
- 혁신의 뿌리, p10.
그렇다. 사실은 이게 전부인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들을 보면, 수상하지 못한 사람들보다 예술 쪽의 취미를 함께 갖고 있는 비율이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누군가는 이게 직관적이지 않다고 얘기하더라마는, 우리의 뇌에서 어떤 연결이 일어나면서 새로워 보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위해서는 적당한 휴식과 다양한 관점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충분히 납득이 되는 이야기인데...
과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까? 혹은 예술적인 취미가 과학적인 성취에 주는 영향은 줄어들지는 않을까?
사실 그럴 것이라는 게 이 책을 읽으면서 느껴야 하는 점인 것 같은데, 거꾸로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과 기술, 그에 수반한 산업의 발전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인류에게 장밋빛 미래를 안겨줄 것이라는 기대감만을 심어준 시기가 있었다. 그 때 사람들은 뻔히 눈으로 '보면서'도 그 원리를 알지는 못했던 많은 자연현상들이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설명되는 것에 경탄했고, 그 존재조차 그려보지 못했던 수단을 통해 행동이나 사고의 반경이 확장되는 것에 열광했다. 이 시기의 과학은 모두가 보고 느낀 것을 하나하나 조악하게나마 설명해나가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는 예술은 과학이 탐구하는 영역을 함께 헤쳐나갈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떨까? 과학이 탐구하는 영역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해 138억 광년의 반경을 갖는 공간으로 확장됐고, 찰스다윈의 진화론으로 인해 생물 다양성의 기본 메커니즘 단계로 깊어졌고, 양자역학으로 인해 우주의 기본입자를 찾아내는 수준까지 정밀해졌고, 컴퓨터공학의 발달로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지성의 발현을 걱정해야 하는 단계까지 복잡해졌다.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4차원 이상의 공간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없으며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지성이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고차원적인 지성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관측 자체가 관측 대상에 영향을 주는 미시 세계에서 벌어지는 확률 게임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없으며, 가속 팽창하는 우주에서 우리가 관측 가능한 138억 광년 바깥의 우주를 결코 관찰할 수 없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모호성의 시대는 대조, 부조화의 병렬, 끊임없는 불확실성으로 점철되어 있다."
- 혁신의 뿌리, p29.
어떤 의미에서 이제 남은 건 '디테일에 천착하는 것' 뿐인 것은 아닐까? 예술이 우리에게 제공한 혜택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감각이 수용할 수 있는 자극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어느 정도의 추상화를 통해 어떤 고차원적인 개념을 저차원적인 감각으로 바꿔줄 수는 있겠지만, 추상화시킬 대상인 개념이 불가해한 영역에 있다면 저차원의 감각을 통해 고차원의 개념을 이해하는 직관은 피어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으로서 갖고 있는 생물학적 한계 안에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이미 대부분 정해져 있다면, 이제부터 과학이 가는 길은 대부분 대중의 이해나 관심에서 멀어지는, 지루하고, 따분하며, 설명해줘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 밖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혁신들이 모여서 우리의 생활 양식이나, 혹은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어떤 지점 - 말 그대로, 특이점 - 이 어느 순간 찾아오면, 우리는 그제서야 세상이 어떻겐가 바뀌었다는 것만 인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술가와 과학자는 공히 그들이 속한 시대의 사회적, 철학적, 기술적 맥락 속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기억하자."
- 혁신의 뿌리, p7.
책의 메시지와는 다소 다른 결론에 도달했지만, 예술가와 과학자가 각자 시대의 맥락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더라도, 과학이 우리의 감각 체계 너머를 탐구해나가는 이상 가속팽창하는 우주의 범위가 실질적으로는 점차 줄어드는 것처럼 과학과 예술이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영향력 또한 점차 줄어드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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