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문을 열어젖혔어요. 얼굴에 귀엽게 주근깨가 난 나의 귀여운 열 살짜리 아들이 벨트로 목을 매 2층 침대에 매달려 있더군요. 아이의 눈은 텅 비어 보였고, 입술은 파랗고 아무 표정도 없었어요."
아이들을 놀게 하라, p218.
어느 날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읽다가 거의 울 뻔 했다.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어느 10살짜리 아이가 주에서 주관하는 이해력 평가에서 거푸 낙제점을 받고 '완전히 좌절한' 나머지 한 극단적인 선택에 대해 아이의 어머니를 인터뷰한 내용 일부인데, 미국의 공교육 강화 정책이 표준 시험의 강화와 학업 스트레스의 증가로 이어지는 현상에 대해서 다루는 중에 나온 아주 극단적인 사례지만, 그 대한민국에서 6살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곧바로 '수능'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지금 당장이든 나중이든 아이를 키운다면 아마도 멀게만 느끼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측정되지 않는 것은 관리되지 않는다.'는, 아마도 피터 드러커의 유명한 말이 이 '표준 시험'의 밑바탕이 되는 철학과 맥이 닿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학업 성취도를 일관된 잣대로 평가하여 그에 따른 보상을 관리하거나 학급, 학년, 학교, 지역, 나라 단위의 성취도 자체를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정량 평가는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무엇을 대상으로 하냐에 따라, 그 대상이 어떤 맥락에 있냐에 따라 평가가 대상을 반영하는 정도가 달라지며, '평가 결과가 곧 대상의 본질'이라는 태도가 평가의 불완전함과 만나면 부조리가 된다. 예를 들어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정량화의 혜택을 가장 온전히, 그리고 직접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대상은 내가 사용하는 시간이다. 이는 운적인 요소가 개입하는 산출물보다 투입자원 자체를 관리하는 것이고, 측정하는 대상 자체가 1차원의 양적 요소이므로 숫자에 반영하는 과정에서 왜곡되거나 배제되는 요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도 '데일리 리포트'는 탁월한 솔루션이다.
반면 소위 말하는 '교육열'과 우리나라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표준 시험을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 대학은 중요하지만 대학이 누군가의 인생을 전적으로 결정하지 않으며, 학벌이 경제적인 성공에 미치는 영향은 부모 세대보다 우리 세대, 우리 세대보다 우리 아이 세대에서 더 줄어들 것이다.
- 인공지능의 발달로 미래의 직업에 대한 불확실성은 점점 커질 것이며,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학벌이나 학위, 국가자격증이 아니라 실력 그 자체이다.
- 지금보다 미래에 더 중요한 실력의 핵심에는 문제해결능력이 있으며, 복잡하고 거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창의성, 협업, 갈등 해소, 학습 능력이 중요한데, 수능 점수나 수능 점수만을 위한 교과 지식은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매우 떨어진다.
내가 우리나라의 수능제도와 입시열, 그리고 제 아이의 교육에 대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우리나라가 수능이라는 표준 시험 제도를 운영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이를 통해 아이들의 학업 성취도를 정량 평가하여 이를 기반으로 어떤 학교나 학과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라는 보상을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배움을 받아들일 능력'을 평가한다는 수능이 과연 어떤 학생의 학습능력 자체, 혹은 앞으로 함양할 문제해결능력을 얼마나 반영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는 점이다. 궁극적으로 대기업 취직이라는 경제적 보상의 가능성을 높이는 명문대 입학이라는 보상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수능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수능이 문제해결능력도 학습능력도 아닌 학업성취도를, 그나마도 왜곡된 형태로 평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마어마한 부조리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모든 걸 다들 어느 정도씩은 인지하고 있을 것임이 분명한데도 많은 부모가 아이의 더 높은 수능 점수를 목표로 그들 자신의 미래와 아이의 현재를 '갈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즉 대상을 정확히 측정하지 못하는 정량 지표에 근거하여 어떤 관리를 시도하는 것인데, 이는 당연히 제한적이거나 기대에 못 미치는 혜택을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을 들여 얻는 결과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걸 다 알아도 미래의 불확실성과 집단의 압력이 함께 작용하면, 모두가 불태우는 입시열 속에서 혼자 냉정을 유지하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다. 이렇게 떠드는 내 아이도 제법 강도 높은 학업을 소화하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놀 기회를 상당히 잃을 것이다. 부모로서는 아마도 잘 해내리라 기대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내 아이나 그 친구들이 감내해야 하는 압박이나 경쟁, 학업을 위해 잃어야 하는, 그저 즐겁기 위해 뛰어놀고, 지루해하고, 꼼지락거리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 그 모든 기회들을 생각하면 무득 우울해지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나마 이런 문제의식을 가졌을 때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아이가 받는 어려움을 알아주고, 성취를 인정해주고, 가능성을 믿어주고, 쉴 기회, 놀 기회를 만들어주고, 무엇보다 수능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수능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려면 대체 무엇이 인생이라고 아이에게 보여줄 것인가? 결국 부모인 나 자신의 인생관을 세우는 것이 먼저라는 뻔한 결론에 도달한다.
이게 아마도 우리가 나이와 무관하게 계속 공부하고 고민하고 실천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아이의 눈은 텅 비어 보였고, 아무 표정도 없었다.'
내가 갈아넣은, 갈아넣고 있는, 혹은 갈아넣을 아이의 현재란 게 과연 뭔지도, 늘 염두하고 고민할 일이다.
파시 살베리, 윌리엄 도일, "아이들을 놀게 하라", 로크미디어, 2021.
책을 읽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격한 경험을 한 적도 별로 없어서, 아직 반 밖에 읽지 않은 책이지만 감상이 흐려지기 전에 부랴부랴 글을 썼다. 반쯤 읽은 지금으로서는 대체로의 내용이 정책 수준의 얘기들이라 개인 수준에서 직접적으로 적용할만한 요소들을 찾는 재미는 적은 책이라고 평가한다. 즉 많은 사람들에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정도의 반응을 일으킬 것 같은 책이라는 건데, 후반부는 어떨지 마저 읽어보고, 가능하다면 한 편 정도 글을 더 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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