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할 수 있는 능력.'
간단 명료하면서도 모든 것에 걸쳐 있는 정의다. 기후 변화라는 인류 스케일의 위기를 맞아 기존의 화석 에너지에서 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는 앞으로 2~30년이 왜 격변의 시기가 될 것인지도, 이 정의 하나만 곱씹어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에너지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이므로, 인류가 고도의 문명을 건설하고 항성 간 여행이라는 꿈 같은 일을 해내든, 내가 단지 방 구석에 앉아서 숨만 쉬든 이 '에너지'라는 것이 필요하다. 무한동력을 개발했다는 주장이 왜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인지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우리의 몸이 에너지를 섭취하는 경로인 음식의 생산이라는 문제 또한 크고 복잡하고 머리 아픈 문제지만, 여기서는 우리의 문명을 지탱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큰 스케일의 에너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아주 거시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은 지구가 속한 계의 주인인 태양이 제공하는 에너지에 의해 일어난다. 우리의 문명도 마찬가지인데, 산업혁명 이후 우리의 주요 에너지원이었던 화석연료를 구성하는 것으로 알려진 고대의 동식물이든, 이 화석연료의 주요 대체 에너지로 언급되는 태양광 혹은 풍력이든 결국 태양으로부터 얻는 에너지를 어떻게 우리가 사용 가능한 형태로 전환할 것인지가 핵심이다. 그리고 화석연료에서 태양광 혹은 풍력으로 대표되는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과정에서 핵심에는 '전기'라는 형태의 '힘'이 존재한다.
그레천 바크의 <그리드>는 우리의 삶 그 자체를 떠받치고 있는 전력망 자체를 '그리드'라는 거대한 기술/법률/문화/경제적 기계로 개념화하여 그 특성과 한계, 그리고 에너지 전환기를 맞이한 도전 과제와 발전 방향 등을 보여준다. 전기가 발견되고, 전력을 상업적으로 이용해 온 역사 속에서 미국의 그리드가 어떻게 확장되어 왔는지, 현 시점 - 책의 집필 과정과 출판 시점 기준이며, 2010년대 초반 - 에서 미국의 그리드가 어떤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리드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드의 취약성에 의해 겪는 문제들, 그리고 그 극복을 위한 가능성등을 이 책을 통해 접할 수 있다.
"그리드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공학적 성취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기계이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 그리드, p8.
'그리드'는 전기라는 힘이 '여기'서 생산되는 동시에 '저기'서 사용되는 국가 혹은 지역 단위의 거대한 매개체이다. 이 매개체를 타고 거의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전기라는 힘의 특성과 이를 매개할 수 있는 그리드 덕분에 전기가 주는 혜택을 누리기만 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힘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장치들이 어떤 사회/환경적 비용을 지불하면서 작동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힘을 만들어내고 전달하는 장치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과 비용이 투입되어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이미 차고 넘치게 깨끗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 수 있다. 이들에게 친환경 에너지 전환을 위한 노력은 대체로 비싸고 주행거리 짧은 전기차를 약간의 고생을 감내하면서 타는 것일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 삶에 필요한 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아주 시끄러운 소음과 막대한 양의 시커먼 먼지를 뿜어내는 비히모스'는 여전히 존재하고, 우리는 이 '비히모스' 작은 버전인 내연기관 자동차를 통해 에너지 전환의 핵심을 엿보고, 나아가 전기라는 힘을 탄소 없이 저장하는 능력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정보화 시대란, 소통, 사회 활동, 심지어 학습조차 전기에 기반해 다시 구성되는 시대다."
- 그리드, p7.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동조차도 전기에 기반해 이루어지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내연기관이란 건 화석연료에 저장되어 있는 에너지를 열에너지로 바꾸고, 이 열에너지를 다시 운동에너지로 바꿔주는 기관인데, 이걸 갖고 터빈을 돌려서 전기를 만들면 발전이고, 바퀴를 굴려서 이동하면 자동차인 것이다. 우리가 타는 자동차 안에서 연료가 연소되고, 크랭크를 돌려서, 바퀴가 구르고 그 결과로 우리가 앞으로 나가는 과정에서 전기는 개입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기본적으로 '효율'의 문제인데, '크랭크를 돌려서 전기를 만들고, 모터를 돌려서' 바퀴를 굴리는 게 비효율적이라는 건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한 편으로 이것은 '저장'의 문제이기도 한데, 전기 자체는 힘이지 에너지가 아니기 때문에 저장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기로 움직이는 이동수단이라는 개념이 성립하려면, 어떤 형태든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전기라는 형태의 힘으로 전환하는 장치가 필요한데, 리튬-이온 배터리와 수소 연료전지가 주요하게 언급되는 후보이고, 이 둘은 '화석 연료를 연소시켜 크랭크를 돌리는' 과정과 함께 해당 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소에서 자유로우면서, 어느 정도의 에너지 효율을 낼 수 있기 때문에 그토록 많이 언급되는 것이다.
"전력을 순식간에 소모시키고 그리드의 상황을 교란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요인은, 석유와 석탄이 연료일 경우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 그리드, p355.
여기서 생산된 힘을 순식간에 저기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전기를 매개하는 그리드의 능력은 무한하지 않다. 그리드로 연결된 두 지점의 전압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전류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리드를 구성하거나 그리드에 연결된 장비에 데미지가 발생하며, 이 데미지가 누적되면 전기를 매개하는 그리드의 전체적인 능력이 줄어들면서 그리드 내의 약한 고리에 부담이 가중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전기를 사용하려는 수요는 전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활 패턴에 따라 계절성, 시간성을 띠는데, 똑같이 계절성과 시간성을 띄는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원이 그리드에 연결되면, 그리드에 가해지는 부담은 폭증한다. 또한 이동까지 전기로 하며 자동차도 정보화를 위한 컴퓨터가 되는 시대에 추가되는 수요를 공급과 연결하기 위해 그리드가 짊어져야 하는 부담은 훨씬 더 커질 것이다.
배터리와 수소가 화석연료에서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자체로 에너지를 저장하고 있는 물질인 화석 연료와 달리 태양광과 풍력으로 대표되는 신재생에너지는 수요와 상관 없이 예측 불가능한 시점에 저장 불가능한 전기라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이를 저장하고 필요할 때 꺼내 씀으로써 전기의 수요와 공급을 맞춰주는 수단은 우리가 전기의 시대에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란 지구촌 공동체로서 인류 전체일 수도 있지만, 국가나 회사, 가족이나 개인일 수 있고, 경쟁이 기본값인 세상에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일지는 굳이 따져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탄소 중립과 전기차의 시대에 친환경 발전과 전기차 보급 뿐 아니라 우리의 그리드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쉽고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과연 우리는 기후변화 위기에 대응해서 여전히 있는지도 모르게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그리드를 가질 수 있을까? 최소한 정말로 그 존재조차 몰라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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