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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확신을 '달라'는 말

 

나에게 확신을 줘.

10년쯤 전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를 하던 중에 들었던 말이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 속 왕자님이 바로 나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야 되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서 굉장히 당황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분명히 다른 무언가로 마음 상하는 게 있었던 것이었을텐데, 당시의 나는 곧이 곧대로 '확신을 얻는다'는 말에 꽂혀서 '결혼은 상대와 함께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지 상대에게 확신을 당하는 게 아니다'는 취지의 입바른 헛소리를 지껄였더랬다. 감사하게도 맥락적으로 헛소리인 것보다 입바른 소리긴 하다는 데 집중해준 아내 덕분에 지금까지 그럭저럭 괜찮게 서로 의지해가면서 살아오고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생각에 아찔한 기분이 든다.


피트 데이비스, "전념", 상상스퀘어, 2022.


이러한 예는 끝도 없이 많지만, 이쯤이면 이미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유대는 느슨해졌고, 신뢰는 얕아졌으며, '선택지 열어두기'가 이 시대의 모토가 됐다.

<전념>, p83.

그건 그렇고, 왜 이제와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렸냐면,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무한 탐색 모드'로 정의하는 문화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의 '전념(Dedicated)'이라는 가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이 책은 선택지를 열어두는 것의 장점이 이제는 보다 단점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자발적 헌신을 통해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부모의 신분에 종속된다거나, 가업을 이어야만 한다거나, 결혼의 상대를 부모가 골라준다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아이가 생기면 낳아서 길러야 한다거나, 다양한 모습의 비자발적 헌신과 그에 따른 불행은 선택지를 열어두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지고 사회적으로 인정되면서 줄어들었다. 하지만 선택지 열어두기의 문화가 지배적인 문화가 되면서, 사람들은 다른 선택지를 잃는 두려움, 하나의 선택지에 헌신할 때 생길 수 있는 정체성의 변화 등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변화는 느리게, 서서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

<전념>, p36.

하지만 무언가 변화시키려면 - 그것이 사회든, 기술이든, 공동체든, 가족이든, 심지어 내 자신이든 -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상당량의 시간을 어떤 변화에 투입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이 '헌신'의 의미이므로, 헌신의 부재는 곧 개선의 부재로 이어진다. 그래서 저자는 책에서 '어떤 형식으로든 우리 세계가 끝난다면 그 이유는 헌신의 부재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닐까.


기꺼이 약속하고 맹세하는 것, 내 삶에 대한 통제력을 일부 포기함으로써 찾아올 불확실성을 직면하는 것,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 관계 형성 이후의 모든 순간이 늘 행복하지는 않더라도 전체로서의 유대 그 자체는 행복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바로 결혼이고 헌신이다.

<전념>, p144.

10년 전의 입바른 헛소리는 다행히 10년의 전념으로 이어졌고, 둘로 시작한 가족은 셋이 됐으며, 7살짜리 아이에게 어느 정도 탐색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재정적 상황을 만들었으며, 아내와 나 모두 각자의 직장에서 어느 정도 인정 받고, 비슷한 도전을 마주하면서 서로 조언과 위로를 주고 받으며, 우리의 노후에 대한 준비도 어느 정도는 해 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분명히 상대방에게 피동적으로 얻어야 하는 '확신'이라는 가치에 기댄 결혼생활이었다면 이 정도로 무탈하게는 오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인생의 동반자로 '선택'한 상대와 잘 살아내겠다는 '결심'과 그에 부합하는 '전념'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만큼이나마 이룬 게 아닐까. 앞으로도 살 날은 많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끝없이 쏟아지겠지만, 이런 전념의 과정을 통해 분명히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가장 필요한 도약을 이뤄내고, 깊이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에서도 얘기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배수진을 치고 절대 물러나서는 안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 더 깊게 파고들고,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인내하고 헌신하는 과정을 통해 생각보다 많은 문제가 해결되고 불안이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전념하는 과정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길고, 초연결된 사회는 예전보다 짧은 시간에 극단적인 창발을 만들어낸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학습능력, 그리고 전념하는 자세가 있다면 아마도 인생에 의미 있는 변화를 이룰 기회가 우리 생각보다 여러 번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세상에 대해서 투덜대기 전에 내 방에 널브러진 이불부터 개자.


그들은 삶의 공터를 받아들이거나 버리는 대신, 변화시켰다.

<전념>,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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