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G니 5G니 하면서 모두가 스마트폰을 하나씩은 들고 다니는 오늘에도, 자신의 최신 스마트폰이 정말로 ‘스마트’하기 위해서는 ‘기지국’이라는 무선 연결 네트워크 장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제법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반도체와 스마트폰, 티비로 대표되는 삼성전자가 이 장비를 공급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더 많지 않을까.
위의 사진 같은 물건이 필요하다. 전파를 쏴주고, 받아주는 안테나와, 이 입출력을 담당하는 유닛 — 사진에는 딱 여기까지만 있어서, 그나마 깔끔한 것이고, 이거 이상으로 깔끔하게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 그리고 전파를 통해 어떤 정보를 얼마나 어떻게 주고받을지 관리하는, 일종의 두뇌 역할을 하는 유닛이 존재하고, 이를 또 글로벌 네트워크와 연결하여 장비를 관리하고, 가입자 정보를 관리하고, 사용자의 트래픽을 전달하는 등등등… 오만가지 역할을 하는 장비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것이 우리가 스마트폰을 스마트폰답게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인프라다.
우리가 집에서 랜선이 꽂힌 PC를 통해 인터넷에 접속할 때는, 물론 모뎀이라는 게 필요하지만, 이런 장비까지는 필요하지 않다. 물리적인 연결 — 사실 전파도 ‘물리적’이지만, 여기서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리선이나, 광섬유 같은 것만 얘기하자 — 을 통해 인터넷이라는 어떤 관념적인 것에 접속하면, 그걸 실제로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광랜’보다는 ‘LTE-A’가, ‘기가랜’보다는 ‘5G NR’이 그렇게 프로모션의 대상이 되는 것은, 기존의 손에 잡히는 케이블을 통한 연결이 닿지 않는 곳까지 ‘인터넷’을 확장시키는 것 자체가 거대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고, 전파를 통한 연결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새로운 기술적 도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일반 사용자들은 기지국 장비를 포함해 ‘인터넷’이라는 게 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심지어 기지국 장비를 만드는 회사조차도 ‘인터넷’이라는 게 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인터넷’이라고 부르는 TCP/IP 기반의 상호 연결된 컴퓨터(및 디바이스)의 글로벌 네트워크는 일반적으로 우리 인식 밖에 있는 거대한 무엇이다. 기지국 장비 없이 우리의 스마트폰이 무용지물인 것처럼, 인터넷이 없다면 기지국 장비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조너선 E. 힐먼, “디지털 실크로드”, 커넥팅.
하지만 누가 통제하느냐에 따라 해방 또는 억압을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디지털 실크로드, p7.
이미 있는 인터넷이 없다는 상황을 가정한다는 것은 이게 없어지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인데, 그 자체로 유기체나 다름없는 네트워크의 네트워크가 한순간에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네트워크를 조작하고, 그 안을 오가는 정보에 대한 통제력을 어떤 정치 집단이 가지는 것은 어떨까? 우리가 중국이라는 국가로 지칭하기도 하는 중국 정부를 운영하는 ‘중국 공산당’이, 중국이라는 국가가 갖고 있는 거대한 시장과, 중국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시장 접근성과 거대한 자금 흐름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조너선 E. 힐먼의 <디지털 실크로드>는 바로 이러한 중국 공산당의 글로벌 네트워크 지배력 확대 전략이 어떻게 추진되고 확대되어 왔는지,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가 최초에는 순진한 믿음과 상업적 욕심으로 이를 방조하거나 심지어 적극적으로 도와주기까지 하다가, 현재에 와서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다룬다. 미국 국무장관 정책기획실 선임 고문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굉장히 미국 정부 중심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 책이지만, 헌법에 ‘자유 민주주의’를 명시하고 있는 미국의 군사동맹국이자, 글로벌 무역망의 한 축으로서 중국을 최대 무역국으로 갖고 있는 국가의 일원으로서 한 번쯤 흥미를 가져볼만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칼루치가 청문회에 출석하기 한 달 전에 장쩌민은 당의 고위 간부들에게 완전히 다른 비전을 제시했었다. 그는 “정보 네트워크는 이미 사상과 문화의 새로운 장이자 새로운 이념적, 정치적 격전지가 됐다”고 선언했다.
디지털 실크로드, p72.
런정페이는 이 만남에서 아이디어를 하나 제시했다. “스위칭 장비 기술은 국가 안보와 관련이 있고, 자체적인 스위칭 장비가 없는 나라는 군대가 부족한 나라와 같다고 말하자, 장 주석은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디지털 실크로드, p60.
국영은행들도 정부의 메시지를 알아들었다. 화웨이는 무이자 대출을 받았고, 300만 달러 이하의 대출에 대한 규제가 면제되었으며, 2000년에는 10억 달러 규모의 한도 대출을 두 번이나 받았다.
디지털 실크로드, p63.
유명한 해저 케이블 생산업체들은 장기간에 걸쳐 쌓은 실적을 자랑했지만, 화웨이의 재정 지원책에 필적하는 조건을 가진 곳은 없었다.
디지털 실크로드, p231.
그리고 소외된 시장의 생존이 화웨이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화웨이의 생존이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여전히 남들이 간과한 시장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디지털 실크로드, p127.
중국 공산당이 글로벌 네트워크에 갖고 있던 비전은 철저하게 이념 지향적이었고, 그들의 전략은 어떻게 국가 차원에서 가진 모든 자원을 이용해 글로벌 네트워크에서의 주도권을 가질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서구의 기술 대기업들이 기업 단위로 경쟁할 때, 중국 공산당은 국가 차원에서 시장 접근성을 미끼로 기술 이전을 요구하고, 자국의 기술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골적인 정보자산 탈취를 지원했으며, 국영은행을 통한 거의 무제한의 자금 지원을 통해 자국의 기업이 파산의 우려 없이 마음껏 공격적인 수주를 통한 경험 확보와 공격적인 투자를 통한 인력 확보, 기술 개발, 업무 관행 등의 전수를 추진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외교 차원의 지원을 통해 사업 상 일어나는 마찰 — 예를 들면 과대 광고에 못미치는 성과에 대한 책임 소재와 같은 — 을 줄여주었다.
중국이 세계 최고의 네트워크 사업자가 되면 상업적이고 전략적인 이익을 거둘 수 있다.
디지털 실크로드, p34.
국가 혹은 정부가 일반적으로 기업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던 부분에서 지배적인 플레이어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그 영역에서 경쟁해야 하는 민간 기업의 관점에서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다. 일반적으로 정부나 공기업이 민간 기업과의 경쟁에서 효율 문제로 뒤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좀 더 최종 소비재 시장에 가까운 영역에서 성립하는 얘기이고, 대규모의 장기적 투자가 필수적인 영역으로 갈 수록 사업상의 안전장치가 보장되어 있는 쪽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 같은 거대 경제를 운영하는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자금력과 정치력은, 민간 기업의 차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이고, 사업의 측면에서 이것만큼 공격적인 사업의 확장을 가능케 하는 요인은 없는 것 같다.
거기다 경제와 안보가 겹치는 영역이 더 넓어지고 뚜렷해지는 추세에서는, 정부 차원에서도 더 이상 기업들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게 된다. 최근 바이든 미대통령의 방한 첫 일정이 삼성전자 평택공장이었던 것이 의미하는 것도, ‘디지털 원유’라고 할만한 반도체의 안정적인 확보가 국가의 안보와 국가간 경쟁에 매우 중요해진 한 편, 첨단반도체에 대한 투자실패의 리스크가 개별 기업이 감당할 수준을 아득히 넘어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책에서 ‘디지털 전기’라고 표현되는 글로벌 정보 네트워크에의 연결 경쟁에 있어서 지난 40년간 중국 혼자 해 오던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 그 대표주자인 화웨이는 중국 정부의 다양한 지원에 힘입어 이제 라우터와 국제 광통신 케이블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4G LTE 네트워크의 70%를 설치하는 등 말 그대로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다. 중국만의 이런 정부-기업 협업체제에 미국 정부가 위험성을 느끼고 대응을 모색하기 시작한 앞으로의 10년은 과연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여기에 삼성의 네트워크 사업이 망하는 — 혹은 살아남는 — 시나리오가 달려 있는 것 같다.
이 문제는 미 의회에서 초당적인 지지를 받아, 2021년 국방 예산으로 5G 네트워크 개발과 개방형 RAN 가속화를 위해 7억 5,000만 달러가 책정되었다.
디지털 실크로드, p137.
미국과 서방 세계가 화웨이의 제품을 그들의 네트워크에서 퇴출시키기로 결정한 이후, 이 정치적인 판단의 결과로 삼성의 네트워크 사업이 미국과 유럽에 진출할 기회가 생겼다는 점은 명백하다. 다만 이 기회가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을 수 있는데, 갑작스러운 시장 확대가 가져올 개발 부담은 극복할 수 있더라도 일정 기간 내에 화웨이의 제품이 그들의 고객들에게 제공하던 이득과, 장밋빛으로 포장된 기대치마저 따라잡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다. 아무리 정책적인 압력이 있더라도, 경제적인 이익을 포기하면서 한국의 작은 — 삼성은 큰 기업이지만, 네트워크 사업은 이 업계의 탑티어에 비하면 매우 작은 규모다 — 공급사를 벤더로 계속 선정할 인내심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핵심은 가격이다. 5G 네트워크의 설비투자는 그만큼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 가격을 떨어트리기 위해서 개방형 RAN(Radio Access Network)이 논의되는 것이다. 개방형 RAN이란, 기지국을 구성하는 장비의 더 많은 부분을 공용화하고 벤더 간 연동이 가능하게 함으로써, 각 장비 별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고 이로부터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의 일환으로 고려되는 형태의 무선 네트워크 표준인데, 관건은 ‘벤더간 연동’이고— 쉽지 않다 — 삼성과 같은 후발 주자는 여기에 빠르게 참여함으로써 시장 확대를 노릴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제품 판매 마진이 축소되는 구조에서 수익성을 잃을 리스크 또한 존재한다.
불평은 경쟁하는 데 필요한 전략적 통찰력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디지털 실크로드, p22.
장기적으로 글로벌 네트워크의 패권을 중국이 가져간다면, 우리는 디지털 권위주의가 득세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삼성의 네트워크 사업은 계속해서 쪼그라드는 시장에서 악전고투하다가 그 명맥이 끊길 수도 있을 것 같다. 반대로 미국과 그 동맹이 현재 갖고 있는 네트워크 지배력을 유지하거나 더 강화할 수 있다면, 네트워크 보안에 대한 정치적 판단에 의해 삼성의 네트워크 사업이 중단될 가능성은 낮겠지만, 5G 무선 네트워크의 구축 경쟁 과정에서 개방형 RAN의 비중은 높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구조적으로 끊임 없는 신규기능 개발을 위한 비용이 증가되는 와중에 마진이 악화되는 것을 상쇄하는 이상으로 시장 확대를 해내지 못한다면 마찬가지로 사업이 정상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어느 쪽이든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나마 나은 시나리오가 어느 쪽인지는 명백해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은 상황에 불만을 터트리기보다, 정치적으로 주어진 몇 년의 유예를 어떻게 활용해서 위기를 기회로 바꿀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무엇보다 나의 사업부 동료들이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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