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삼성의 네트워크 사업이 망하는 날

 4G니 5G니 하면서 모두가 스마트폰을 하나씩은 들고 다니는 오늘에도, 자신의 최신 스마트폰이 정말로 ‘스마트’하기 위해서는 ‘기지국’이라는 무선 연결 네트워크 장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제법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반도체와 스마트폰, 티비로 대표되는 삼성전자가 이 장비를 공급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더 많지 않을까.

삼성전자의 네트워크 사업 소개 페이지에서 발췌. 최대한 깔끔한 이미지를 뽑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출처: 삼성전자 홈페이지)


이런 무시무시한 게 필요하다. 맨 위의 그나마 매끈한 게 안테나로, 홈페이지의 제품에 그나마 가까운 것. 이게 우리의 스마폰을 스마트하게 만들어주는 인프라다. (출처: 카카오맵 로드뷰)


위의 사진 같은 물건이 필요하다. 전파를 쏴주고, 받아주는 안테나와, 이 입출력을 담당하는 유닛 — 사진에는 딱 여기까지만 있어서, 그나마 깔끔한 것이고, 이거 이상으로 깔끔하게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 그리고 전파를 통해 어떤 정보를 얼마나 어떻게 주고받을지 관리하는, 일종의 두뇌 역할을 하는 유닛이 존재하고, 이를 또 글로벌 네트워크와 연결하여 장비를 관리하고, 가입자 정보를 관리하고, 사용자의 트래픽을 전달하는 등등등… 오만가지 역할을 하는 장비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것이 우리가 스마트폰을 스마트폰답게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인프라다.

우리가 집에서 랜선이 꽂힌 PC를 통해 인터넷에 접속할 때는, 물론 모뎀이라는 게 필요하지만, 이런 장비까지는 필요하지 않다. 물리적인 연결 — 사실 전파도 ‘물리적’이지만, 여기서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리선이나, 광섬유 같은 것만 얘기하자 — 을 통해 인터넷이라는 어떤 관념적인 것에 접속하면, 그걸 실제로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광랜’보다는 ‘LTE-A’가, ‘기가랜’보다는 ‘5G NR’이 그렇게 프로모션의 대상이 되는 것은, 기존의 손에 잡히는 케이블을 통한 연결이 닿지 않는 곳까지 ‘인터넷’을 확장시키는 것 자체가 거대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고, 전파를 통한 연결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새로운 기술적 도전이기 때문이다.


이게 인터넷의 ‘일부’를 시각화한 것이다. 무선연결은, 이 가지의 수와 범위를 더욱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그걸 다 이 그림에 더하더라도 본질적인 네트워크의 형태는 바뀌지 않는다. (출처: 위키피디아)


여기서 핵심은, 일반 사용자들은 기지국 장비를 포함해 ‘인터넷’이라는 게 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심지어 기지국 장비를 만드는 회사조차도 ‘인터넷’이라는 게 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인터넷’이라고 부르는 TCP/IP 기반의 상호 연결된 컴퓨터(및 디바이스)의 글로벌 네트워크는 일반적으로 우리 인식 밖에 있는 거대한 무엇이다. 기지국 장비 없이 우리의 스마트폰이 무용지물인 것처럼, 인터넷이 없다면 기지국 장비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조너선 E. 힐먼, “디지털 실크로드”, 커넥팅.

조너선 E. 힐먼, “디지털 실크로드”, 커넥팅.


하지만 누가 통제하느냐에 따라 해방 또는 억압을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디지털 실크로드, p7.

이미 있는 인터넷이 없다는 상황을 가정한다는 것은 이게 없어지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인데, 그 자체로 유기체나 다름없는 네트워크의 네트워크가 한순간에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네트워크를 조작하고, 그 안을 오가는 정보에 대한 통제력을 어떤 정치 집단이 가지는 것은 어떨까? 우리가 중국이라는 국가로 지칭하기도 하는 중국 정부를 운영하는 ‘중국 공산당’이, 중국이라는 국가가 갖고 있는 거대한 시장과, 중국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시장 접근성과 거대한 자금 흐름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조너선 E. 힐먼의 <디지털 실크로드>는 바로 이러한 중국 공산당의 글로벌 네트워크 지배력 확대 전략이 어떻게 추진되고 확대되어 왔는지,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가 최초에는 순진한 믿음과 상업적 욕심으로 이를 방조하거나 심지어 적극적으로 도와주기까지 하다가, 현재에 와서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다룬다. 미국 국무장관 정책기획실 선임 고문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굉장히 미국 정부 중심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 책이지만, 헌법에 ‘자유 민주주의’를 명시하고 있는 미국의 군사동맹국이자, 글로벌 무역망의 한 축으로서 중국을 최대 무역국으로 갖고 있는 국가의 일원으로서 한 번쯤 흥미를 가져볼만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칼루치가 청문회에 출석하기 한 달 전에 장쩌민은 당의 고위 간부들에게 완전히 다른 비전을 제시했었다. 그는 “정보 네트워크는 이미 사상과 문화의 새로운 장이자 새로운 이념적, 정치적 격전지가 됐다”고 선언했다.

디지털 실크로드, p72.

런정페이는 이 만남에서 아이디어를 하나 제시했다. “스위칭 장비 기술은 국가 안보와 관련이 있고, 자체적인 스위칭 장비가 없는 나라는 군대가 부족한 나라와 같다고 말하자, 장 주석은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디지털 실크로드, p60.

국영은행들도 정부의 메시지를 알아들었다. 화웨이는 무이자 대출을 받았고, 300만 달러 이하의 대출에 대한 규제가 면제되었으며, 2000년에는 10억 달러 규모의 한도 대출을 두 번이나 받았다.

디지털 실크로드, p63.

유명한 해저 케이블 생산업체들은 장기간에 걸쳐 쌓은 실적을 자랑했지만, 화웨이의 재정 지원책에 필적하는 조건을 가진 곳은 없었다.

디지털 실크로드, p231.

그리고 소외된 시장의 생존이 화웨이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화웨이의 생존이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여전히 남들이 간과한 시장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디지털 실크로드, p127.

중국 공산당이 글로벌 네트워크에 갖고 있던 비전은 철저하게 이념 지향적이었고, 그들의 전략은 어떻게 국가 차원에서 가진 모든 자원을 이용해 글로벌 네트워크에서의 주도권을 가질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서구의 기술 대기업들이 기업 단위로 경쟁할 때, 중국 공산당은 국가 차원에서 시장 접근성을 미끼로 기술 이전을 요구하고, 자국의 기술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골적인 정보자산 탈취를 지원했으며, 국영은행을 통한 거의 무제한의 자금 지원을 통해 자국의 기업이 파산의 우려 없이 마음껏 공격적인 수주를 통한 경험 확보와 공격적인 투자를 통한 인력 확보, 기술 개발, 업무 관행 등의 전수를 추진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외교 차원의 지원을 통해 사업 상 일어나는 마찰 — 예를 들면 과대 광고에 못미치는 성과에 대한 책임 소재와 같은 — 을 줄여주었다.


중국이 세계 최고의 네트워크 사업자가 되면 상업적이고 전략적인 이익을 거둘 수 있다.

디지털 실크로드, p34.

국가 혹은 정부가 일반적으로 기업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던 부분에서 지배적인 플레이어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그 영역에서 경쟁해야 하는 민간 기업의 관점에서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다. 일반적으로 정부나 공기업이 민간 기업과의 경쟁에서 효율 문제로 뒤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좀 더 최종 소비재 시장에 가까운 영역에서 성립하는 얘기이고, 대규모의 장기적 투자가 필수적인 영역으로 갈 수록 사업상의 안전장치가 보장되어 있는 쪽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 같은 거대 경제를 운영하는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자금력과 정치력은, 민간 기업의 차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이고, 사업의 측면에서 이것만큼 공격적인 사업의 확장을 가능케 하는 요인은 없는 것 같다.

거기다 경제와 안보가 겹치는 영역이 더 넓어지고 뚜렷해지는 추세에서는, 정부 차원에서도 더 이상 기업들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게 된다. 최근 바이든 미대통령의 방한 첫 일정이 삼성전자 평택공장이었던 것이 의미하는 것도, ‘디지털 원유’라고 할만한 반도체의 안정적인 확보가 국가의 안보와 국가간 경쟁에 매우 중요해진 한 편, 첨단반도체에 대한 투자실패의 리스크가 개별 기업이 감당할 수준을 아득히 넘어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책에서 ‘디지털 전기’라고 표현되는 글로벌 정보 네트워크에의 연결 경쟁에 있어서 지난 40년간 중국 혼자 해 오던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 그 대표주자인 화웨이는 중국 정부의 다양한 지원에 힘입어 이제 라우터와 국제 광통신 케이블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4G LTE 네트워크의 70%를 설치하는 등 말 그대로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다. 중국만의 이런 정부-기업 협업체제에 미국 정부가 위험성을 느끼고 대응을 모색하기 시작한 앞으로의 10년은 과연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여기에 삼성의 네트워크 사업이 망하는 — 혹은 살아남는 — 시나리오가 달려 있는 것 같다.


이 문제는 미 의회에서 초당적인 지지를 받아, 2021년 국방 예산으로 5G 네트워크 개발과 개방형 RAN 가속화를 위해 7억 5,000만 달러가 책정되었다.

디지털 실크로드, p137.

미국과 서방 세계가 화웨이의 제품을 그들의 네트워크에서 퇴출시키기로 결정한 이후, 이 정치적인 판단의 결과로 삼성의 네트워크 사업이 미국과 유럽에 진출할 기회가 생겼다는 점은 명백하다. 다만 이 기회가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을 수 있는데, 갑작스러운 시장 확대가 가져올 개발 부담은 극복할 수 있더라도 일정 기간 내에 화웨이의 제품이 그들의 고객들에게 제공하던 이득과, 장밋빛으로 포장된 기대치마저 따라잡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다. 아무리 정책적인 압력이 있더라도, 경제적인 이익을 포기하면서 한국의 작은 — 삼성은 큰 기업이지만, 네트워크 사업은 이 업계의 탑티어에 비하면 매우 작은 규모다 — 공급사를 벤더로 계속 선정할 인내심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핵심은 가격이다. 5G 네트워크의 설비투자는 그만큼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 가격을 떨어트리기 위해서 개방형 RAN(Radio Access Network)이 논의되는 것이다. 개방형 RAN이란, 기지국을 구성하는 장비의 더 많은 부분을 공용화하고 벤더 간 연동이 가능하게 함으로써, 각 장비 별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고 이로부터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의 일환으로 고려되는 형태의 무선 네트워크 표준인데, 관건은 ‘벤더간 연동’이고— 쉽지 않다 — 삼성과 같은 후발 주자는 여기에 빠르게 참여함으로써 시장 확대를 노릴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제품 판매 마진이 축소되는 구조에서 수익성을 잃을 리스크 또한 존재한다.


불평은 경쟁하는 데 필요한 전략적 통찰력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디지털 실크로드, p22.

장기적으로 글로벌 네트워크의 패권을 중국이 가져간다면, 우리는 디지털 권위주의가 득세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삼성의 네트워크 사업은 계속해서 쪼그라드는 시장에서 악전고투하다가 그 명맥이 끊길 수도 있을 것 같다. 반대로 미국과 그 동맹이 현재 갖고 있는 네트워크 지배력을 유지하거나 더 강화할 수 있다면, 네트워크 보안에 대한 정치적 판단에 의해 삼성의 네트워크 사업이 중단될 가능성은 낮겠지만, 5G 무선 네트워크의 구축 경쟁 과정에서 개방형 RAN의 비중은 높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구조적으로 끊임 없는 신규기능 개발을 위한 비용이 증가되는 와중에 마진이 악화되는 것을 상쇄하는 이상으로 시장 확대를 해내지 못한다면 마찬가지로 사업이 정상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어느 쪽이든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나마 나은 시나리오가 어느 쪽인지는 명백해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은 상황에 불만을 터트리기보다, 정치적으로 주어진 몇 년의 유예를 어떻게 활용해서 위기를 기회로 바꿀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무엇보다 나의 사업부 동료들이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한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외국보다 한국 초코파이가 초코 함량이 더 높은 이유

여느 몹쓸 공돌이 개그  언젠가 돌아다니던 초코파이 초코 함량 계산식. 답은? 무려 약 31.8%다. 이 정도면 빈츠보다도 높은 함량일지도.. 자고로 무릇 공대생 혹은 공돌이라 하면 '일반인' - 여기서는 비 공대인 -이라면 알 필요도 없는 기호로 범벅이 된 수식을 붙들고 밤을 샌다든지, 거기서부터 파생된 온갖 과제를 하느라 밤을 샌다든지,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들끼리' 머리를 싸메고 수시로 밤을 새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밤을 샌다는 건 낮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고 곧 '일반인'들과의 소통의 기회가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다보면 시나브로 쌓이는 전공 지식과 함께 '바깥 세상'에 대한 환상 그리고 '일반인'들과의 유머적 단절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씩 키우게 되는데, 이런 것들을 비틀어 탄생한 것이 공대 개그 혹은 공돌이 개그이다. 예를 들어 '외국보다 한국의 초코파이가 초코 함량이 더 높은 이유'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면 당신도 훌륭한 공돌이일 가능성이 높은데(힌트는 위 수식을 영어로 바꿔보라는 것이고, 답은 마지막에..), 무릇 공돌이라 하면 이렇게 공돌이를 위한 개그를 이해하고 웃을 수 있는 소양을 갖추게 되고, 일반인들은 해설이 있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개그까지도 즐기면서 모종의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에, 다시 일반인들과의 유머적 단절은 더 공고해진다. 이런 거에 웃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다. - 출처: 나무위키 ' 공대개그 ' 페이지. 나 또한 정통한 공돌이로서 - 입사 전까지 같은 건물에 10년을 들락거렸다! - 유사한 과정을 거쳤고, 일요일 밤을 지배하던 주류 개그는 1도 모르지만 각종 공돌이 개그에는 피식거리는 단계에 도달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이런 상황에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질량이 없는 물질'만 만날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 날로 있는

차멀미가 날 때는 앞을 봐야 한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가족 여행을 가면 나는 꼭 어디에 도착해서야 잠에서 깨곤 했다. 그 때마다 조수석의 어머니께서는 좋은 경치는 하나도 못 보고 밥 먹을 때만 일어난다고 핀잔을 주곤 하셨는데, 아무리 깨어 있으려고 해도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난 여지 없이 곯아떨어졌다. 성인이 된 후에 생각해보니 그 시절의 나는 차멀미를 했던 것이었다. 멀미라는 건 눈과 귀 - 정확히는 전정기관 - 에서 감지되는 움직임에 대한 정보 불일치를 뇌가 불편하게 느끼는 현상이라고 이해하면 얼추 맞을텐데, 차에서 스마트폰을 볼 때 속이 더 메슥거리거나, 운전자는 멀미를 하지 않는 걸 생각해보면 된다. 차멀미를 할 때는 먼 산을 보라거나,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마시라거나 하는 민간요법이 전해지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다 소용 없는 일이다. 달리는 차 창문을 열고 머리 날리게 바람을 맞으면서 볼 것도 없는 먼 산을 아무리 노려보고 있어도, 멀미는 잦아들지 않았다. 조수석에라도 앉을 수 있다면 좀 나았겠지만 조수석에 갈 짬은 전혀 아니었으니 가장 확실히 멀미를 피하는 방법은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는데, 이걸 어느 정도 인지한 다음에는 메슥거림이 느껴질 때는 일부러 눈을 감고 잠드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아마 이 기전이 몸에 쌓이면서 차만 타면 자는 식으로 몸이 반응한 게 아닐까.  ""과학의 속도가 윤리적인 이해 수준을 넘어서면, 사람들은 각자가 느끼는 불편함을 표현하느라 애를 먹게 된다." 2004년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쓴 글이다." - 유전자 임팩트, p620. 어른이 되면서 멀미 자체에 대한 민감도도 떨어진데다 이제는 어디 갈 때 거의 운전석에 앉기 때문에 멀미에 시달릴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급변하는 세상과 기술의 발전을 보고 있으면 가끔 속이 울렁거릴 때가 있는데, 이럴 때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케빈 데이비스, " 유전자 임팩트 &qu

호르몬 불균형과 지방, 그리고 치즈

 호르몬 불균형은 건강에 좋지 않다.  주로 호르몬이 부족하니 뭔가로 보충해야 한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 같긴 하지만, 이 주장에 동의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뭐든 균형 잡힌 게 좋은 법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부족하니 보충해야 한다는 말은 많은데 너무 넘치니 줄여야 한다는 말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글에 '에스트로겐'과 '식품'을 한글과 영문으로 검색해보면, 어느 쪽이든 건강과 미용에 좋은 에스트로겐이 부족한 갱년기에 이것이 풍부한 음식을 먹으라는 소개 페이지만 잔뜩 검색된다. 물론 여기에 소개되는 음식은 거의 '식물성' 에스트로겐을 함유한 호박, 쥐눈이콩, 석류 같은 것들이긴 하지만, 아무튼 과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페이지는 보이지 않는다. 닐 바너드, "건강 불균형 바로잡기", 브론스테인, 2021. 닐 바너드의 <건강 불균형 바로잡기>는 에스트로겐을 비롯한 호르몬의 불균형, 그 중에서도 주로 과다한 호르몬이 어떤 건강 문제들을 일으키는지, 그리고 호르몬 과다를 일으키는 원인과 이를 바로잡기 위한 식습관을 알려주는 책이다. 호르몬 불균형이 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과 식습관 개선을 통해 극적으로 개선된 사례들, 그리고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의학적 연구 결과들을 다양하게 알려준다. 물론 우리가 <영양의 비밀>을 통해 이미 알고 있듯이 우리 몸이 어떤 영양소에 반응하는 정도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여기 소개된 극적인 사례들이 당장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호르몬과 건강에 대해 현대 과학이 밝혀낸 가장 신뢰성 높은 지식을 바탕으로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식습관을 만들어가는 것은 '행복에 있어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안티프래질한 전략일 것이다. "밝혀진 바로 유방암의 최대 위험인자는 호르몬, 그 중에서도 에스트로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