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야 뭐, 늘 그렇듯이 ‘뭘 해줬으면 좋겠는지 모르겠지만 알아서 잘 해달라’는 류의 일이라 멋대로 상황 판단하고 해야겠다고 판단한 일들을 멋대로 하면 됐는데, 문제는 코로나19가 아직 끝나지 않은 시점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모든 입국자에게 요구한 ‘출발 48시간 전에 검사한 PCR 음성결과확인서’였다.
검사는 출발 48시간 이내에 받아야 하는데, 검사 결과는 48시간 이내에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싶다. 오늘 코 찌르면 내일 아침에는 검사 결과가 나오는 게 당연한 우리나라에서나 지킬 수 있는 규정 아닌가?
아무튼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대부분 30시간 즈음해서는 결과가 나온다는 말을 믿어보기로 하고 출발 이틀 전 월그린이라는 약국체인에서 제공하는 드라이브스루 PCR 검사를 받고, 당일 아침까지도 결과 안 나오면 회사에 욕 좀 먹고 비행편을 바꾸지 뭐, 이렇게 편하게 생각했었는데..
웬 걸, 출발 전날 저녁까지도 결과가 안 나오는 와중에, 먼저 결과 나온 출장자 분들이 ‘너만 못 돌아가면 어쩌냐’며 이런 옵션, 저런 옵션을 찾아주기 시작하니까 당장 마음이 갈팡질팡한다. 역시 사람 마음이라는 건 예측이 불가능하다. 뭐든 마음 굳게 먹는 것으로는 대체로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걸 다시 한 번 새길 수 있었다.
그 와중에 Signature Care Emergency Center라고, 2시간이면 결과가 나온다는 무려 PCR 검사 광고가 있었다. 대한민국 방역당국의 요구사항에 확실하게 부합하면서, 24/7이라 늦은 저녁에도 검사를 받고 당일 확실하게 결과를 받을 수 있어서, 내일 아침 비행기를 확실하게 타려는 목적만에는 완벽한 옵션이었다.
그렇다고 이게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닐텐데 싶어서 아쉬운 영어지만 용감하게 전화를 했다. 확실히 전화 영어는 — 수업 말고 — 대면보다 훨씬 어렵다. 하지만 어떻게든 상황 설명하고, 센터에서 제공하는 검사가 PCR이라는 점, 두 시간이면 결과를 받을 수 있다는 점 등을 확인하고.. 사실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가격도 물어봤다. 그렇게 알아낸 가격은 $200 수준. 이 정도면, 괜히 유일한 직항인 아침 비행기를 못 탔을 때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 — 일정 변경에 따른 결재 프로세스라든지, 환승편의 불편함이라든지, 도착 시간이 대폭 늦어지는 점 등 — 을 감당할 리스크 회피 비용으로는 적절한 가격이었다. 무료 검사 놔두고 비싼 검사 받았다고 회사에서 비용 정산을 안 해주는 일이 만에 하나 발생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충분히 지불할만한 비용인 것 같았다.
아무튼 호텔에서 우버를 불러서 응급실로 갔다. 환자가 있으면 무작정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고 했으나,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창구 직원은 친절했고, 내가 부족한 영어로 한 많은 질문에 최대한의 답변을 해 줬다. 한 가지 애매했던 부분은 현장 결제해야 할 비용이 $300 고, 이게 최종 확정액이 아니라 추가 비용이 청구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음.. $300 + alpha라니, 개인 비용 처리하는 옵션도 고려하고 있던 입장에서 조금 부담스러운 수준에 들어왔다. 하지만 문제는 호텔 방에서 전화하던 상황과, 이미 시간과 비용을 지불해서 현장에 도착해 있던 상황이 다르다는 점. 큰 돈은 아니지만 이 놈의 매몰비용이라는 게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결국 OK를 외치고 말았다. 그 놈의 ‘alpha’라는 게 얼마냐고 물어봐도, 자기네 환자들이 평균적으로 $100~$200 정도 부담하는데 정확한 건 지금 알 수 없다는 얘기 뿐이고,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 얘기를 최대 $200 로 한정해서 총 $500 면 어떻게든 되긴 되겠다는 안일한 판단을 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인적사항을 포함해서 서식을 채우고 있는데, 의사들도 할 일이 없었는지 문서는 천천히 쓰고 들어와서 검사부터 하쟨다.
그렇게 쫄래쫄래 간호사를 따라 진료실에 들어갔더니, 진료용 침대에 앉히고 혈압과 심박 모니터링을 위한 기구를 상박이랑 손가락에 채워줬다. 고작 PCR 검사하는데 이게 다 뭔가 싶어서 당황하고 있으니까, 의사가 나타나서 뭐 이런 거 저런 걸 물어보는데, 증상 있냐, 지병 있냐, 최근 수술 경험 있냐 등 우리나라에서도 다 하는 문진이다.
그걸 다 영어로 하고 있는데, diabete니 뭐니 영독단으로 공부한 단어들이 귀에 들어온다. 역시 언어는 어휘가 중요하지, 하면서 한편으로 흐뭇한 와중에 의사한테 ‘PCR 검사하는데 이런 것까지 하냐’고 물어봤더니, 그건 검사소에서나 그렇게 하는 거고 자기들은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응급의료시설이라서 이런 프로세스는 기본적으로 하는 거라는 취지의 고상한 답변이 돌아온다.
아무튼 좋은 분위기에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검체체취까지 하고 나니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는 것 말고 할 일이 없는 시간이 됐다. 자연스럽게 아까 못 채운 서식을 마저 채우고 나니 남은 건 뭔가의 안내문이다. 우리나라도 아닌데 아무데나 덜컥 싸인을 할 수는 없지 싶어서 찬찬히 읽어봤는데, 아.. 아까 그 alpha를 최대 $200 로 가정한 게 얼마나 근거 없는 순진한 믿음이었는지;;
Facility fee는 최소 $500 에서 최대 $100,000, Observation fee는 최소 천$1,000 에서 최대 $100,000 의 범위 내에서 청구된다고 적혀 있다. 중간값은 각 $3,023 및 $27,849 로, 합치면 $30,872 이다. 그리고 금액 청구절차가 완료되고 나면 환자들이 평균적으로 facility fee $104, observation fee $68 를 지불한다는데, 나는 미국에 잠깐 출장 온 외국인이라 보험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주마등이라는 게 이런 건가, 짧은 시간에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최대 10만 달러라니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 ‘3만 달러면 요즘 환율이면 3,500만 원인데, 이걸 어쩌지?’, ‘미국 병원은 드러누우면 깎아준다던데?’, ‘얘네가 경찰이라도 부르면 더 망하는 거 아닐까?’ 등등등…
필사적으로 진정하고 이성의 끈을 붙들어맸다. 어떻게 봐도 간단한 PCR 검사 하나 받으러 온 거고, 얘네의 시설을 대단히 사용한 것도 아니고, CT라든지, MRI라든지 하는 류의 검사를 받는 것도 아니라서, 일단은 최소 비용에 해당할 게 분명했다. 그래도 여전히 $1,500 는 너무 비싸다!
결국 이 모든 불확실성에 대한 소극적인 항의의 표시로 청구 절차 등에 대한 동의의 표시로 하는 서명을 안 하고, 세부 항목에 대한 문의를 다시 해 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덕분에 시간을 빨리 지나가서, 목적했던 음성결과지를 받을 수 있었는데,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정식 응급 의료시설’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고급지다. 그건 그거고 비용 문제에 대해서 더 물어봤다. 여전히 친절한 창구 직원은 내 케이스에 대해서, Level 1 facility fee에 해당하는 $500 이 청구될 거고, observation fee는 청구되지 않을 건데, 문서에 나와 있지 않은 physician fee가 청구될 거라는 뉴스(!)를 또 알려줬다. 그건 각 의사가 청구하는 거라 본인이 알 방법은 없다는 전제로, 창구직원의 추정치는 $2,000 수준. 아무튼 청구 절차 중에 문의사항은 얼마든지 정산 부서와 논의할 수 있다는, 친절하긴 하지만 결국 ‘나한테 얘기하지 마’라는 안내에 막혀서 $300 의 deposit을 결제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아무튼, 비용이 비싸서 그렇지 방역당국의 지침에 가장 충실한 코로나19 음성확인결과서를 갖고 잘 귀국해서, 귀국 후 PCR 검사에서 바로 양성 판정을 받은 것은 여기서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다.
이어지는 절차는, 회사의 출장 정산 프로세스에 맞춰서 청구 절차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저 비용을 내가 지불해야 될 가능성에 대비해서 최종 청구 금액을 최소화하는 것. 출장 정산을 얼마나 지연할 수 있는지 문의하는 한편 현지 에이전시에 — 개인이 보험사를 통해 협상을 진행하는 것처럼, 의료기관도 대행 업체를 통해 청구절차를 진행하는 게 보편적인 모양이다 — 이메일을 보내서, 청구 금액과 절차 기간을 문의했다. 담당자와 거의 한 달 넘게 여러 건의 이메일을 주고 받은 결과, 조금은 허탈하게도 추가 청구액 없음으로 결론이 났다.
처음에는 친절한 창구직원의 추정치 수준으로 $2,000 넘는 금액이 청구될 거라고 했었는데, 메일로 따박따박 이상한 부분을 지적하고 문의를 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담당자가 한 동안 연락이 안 되다가 — 어디 휴가라도 다녀온 건지 — 왠 피곤하게 구는 외국인 하나 상대하면서 고작 몇백 달러 더 받니 마니 실갱이하느니 안 받고 만다는 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진실이야 어찌됐든 결과는 나에게 가장 유리한 모양으로 나왔는데, 받아 든 결과와 무관하게 그 과정에서 영어 학습에 있어 더 느낀 바가 있어 정리해본다.
첫째, 아예 안 할 거면 모르겠으나 할 거면 제대로, 높은 수준까지 공부해야겠다. 어떤 문제에 영어로 접근할 때, 영어 자체의 문제로 더 이상의 접근을 포기하는 각자의 경계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의 사례에서, 내가 도저히 응급실에 전화해볼 엄두가 안 났으면 애초에 이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조금은 허망하게도, 출발 이틀 전에 받은 PCR 검사 결과도 출발 당일 일어나보니 나와 있었다. 혹은 내가 현지 에이전시와 청구 내역에 대해서 이메일 논의를 이어나갈 엄두가 안 났다면, 최초 청구 받은 금액을 모두 지불하고 회사와 금액에 대해서 왈가왈부를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혹은 더 영어 말하기가 능숙했다면 응급실에 전화해봤을 때 적당히 넘겨짚기보다 비용 관련 세부사항을 문의하고 응급실에 방문하지 않는 의사결정을 했을 수도 있다. 결국 영어의 벽을 애매하게 넘었을 때 생길 수 있는 애매한 상황을 맞은 것인데, 최선단의 지식에 접근하는 가장 효과적인 언어인 영어와 담을 쌓고 살겠다고 결정할 것이 아닌 이상, 제대로 영어 구사 능력을 키우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둘째, 역시 듣기/말하기보다는 읽기/쓰기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 나의 사례에서, 내 말하기와 듣기가 더 탁월했다면 문제를 회피할 수도 있었겠으나, 이미 일어난 상황에서는 결국 읽기와 쓰기가 핵심이었다. 응급실에서 받아든 서류를 더 빠르고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면 매몰비용의 오류에 빠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귀국 후에 현지 에이전시와의 소통도 결국 읽기와 쓰기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이번 건을 진행하면서, 그리고 업무 상 만나는 미국 업체와의 기술 논의를 하면서도 느끼는 점 중 하나는, 영미권 혹은 미국 한정으로, 문서보다는 말하기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기술적인 논의에서도 배경과 근거와 주장 — 그러니까 논리 — 이 아주 정제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허다한데, 이번 건에서도 당장 몇 가지 요소를 정리해서 건 별 질문과 종합적인 입장을 글로 전달하니 ‘전화로 간단하게’ 하는 게 좋겠다는 투의 답변이 돌아왔더랬다. 그래놓고 굳이 국제전화 비용을 지불해가면서 전화하니 안 받더라마는, 통화가 되었을 때 과연 지금보다 더 나은 결과를 받을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이다. 정리하면, 어차피 정확한 문제 해결은 대화보다는 문서를 기반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원어민이라고 하더라도 문해력에서는 떨어지거나 읽기/쓰기를 불편해하는 경우가 많으며, 우리가 함양하기 더 쉬운 능력이 읽기/쓰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듣기/말하기보다 읽기/쓰기를 우선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 영어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어 구사 능력보다도 배경지식 자체가 특정 문제의 해결에는 더 중요하다. 훨씬. 위의 사례에서, 문제의 진짜 핵심은 영어보다도 미국의 의료 체계에 대한 이해와 민감성 부족, 해당 체계에서 요구하는 서식에 대한 경험 부족과 같은 것들이었다. 애초에 이런 이해가 충분했다면 영어로 전화를 걸어볼 엄두까지 따질 것도 없이 시도도 안 했을 수도 있고, 할 일 없던 의료진이 부르기 전에 문제의 페이지를 확인했을 수도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의료체계에서 작동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가늠하고, 내 사례와 관련된 당사자들의 입장을 가늠하고, 최종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측정할 수는 없지만 내가 판단하는 적절한 금액을 그 근거와 함께 제시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것조차 없었다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정말로 응급실에서 드러눕거나, 해외 카드 결제를 막아두고 오는 이메일을 무시하거나, 뒷 일이 어떻게 될지 더 알 수 없는 옵션을 골랐을 지도 모른다. 물론 결과적으로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될 수도 있었겠으나, 가능한 손실의 최대치가 $2,000 수준으로 확정되어 있었던 것과 달리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불확실성을 끌어 안는 선택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걸 일의 관점에 접목하면, 영어로 먹고 살고 싶을 때 영어가 먼저냐 전문성이 먼저냐는 문제에 있어서 뻔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걸 영어학습이라는 제한된 영역으로만 한정하면, 어휘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결론도 도출할 수 있다 — 정말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데,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말이 ‘전부’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청구 절차와 함께 상황이 완전히 정리되면 글로 써보려고 했던 것을, 마침 기회가 되어 참여한 성남 빡독x영독에서 먼저 두서 없이 떠들어봤더랬다. 아무튼, 각론은 각자의 맥락에 맞게 조정하는 거지만, 신박사님이 영어 학습에 대해서 얘기하는 총론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동의하는데, 마침 거기에 딱 맞는 경험을 개인적으로 했던 터라 다른 분들과 꼭 나눠보고 싶었다. 정리 안 된 일화와 메시지를 여러 분들 앞에서 즉흥적으로 떠들다보니 긴장도 제법 했고, 제대로 전달이 됐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인데 이 참에 글로 적은 걸 다시 공유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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