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몬 불균형은 건강에 좋지 않다.
주로 호르몬이 부족하니 뭔가로 보충해야 한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 같긴 하지만, 이 주장에 동의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뭐든 균형 잡힌 게 좋은 법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부족하니 보충해야 한다는 말은 많은데 너무 넘치니 줄여야 한다는 말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글에 '에스트로겐'과 '식품'을 한글과 영문으로 검색해보면, 어느 쪽이든 건강과 미용에 좋은 에스트로겐이 부족한 갱년기에 이것이 풍부한 음식을 먹으라는 소개 페이지만 잔뜩 검색된다. 물론 여기에 소개되는 음식은 거의 '식물성' 에스트로겐을 함유한 호박, 쥐눈이콩, 석류 같은 것들이긴 하지만, 아무튼 과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페이지는 보이지 않는다.
닐 바너드, "건강 불균형 바로잡기", 브론스테인, 2021.
닐 바너드의 <건강 불균형 바로잡기>는 에스트로겐을 비롯한 호르몬의 불균형, 그 중에서도 주로 과다한 호르몬이 어떤 건강 문제들을 일으키는지, 그리고 호르몬 과다를 일으키는 원인과 이를 바로잡기 위한 식습관을 알려주는 책이다. 호르몬 불균형이 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과 식습관 개선을 통해 극적으로 개선된 사례들, 그리고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의학적 연구 결과들을 다양하게 알려준다. 물론 우리가 <영양의 비밀>을 통해 이미 알고 있듯이 우리 몸이 어떤 영양소에 반응하는 정도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여기 소개된 극적인 사례들이 당장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호르몬과 건강에 대해 현대 과학이 밝혀낸 가장 신뢰성 높은 지식을 바탕으로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식습관을 만들어가는 것은 '행복에 있어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안티프래질한 전략일 것이다.
"밝혀진 바로 유방암의 최대 위험인자는 호르몬, 그 중에서도 에스트로겐이다."
- 건강 불균형 바로잡기, p71.
과도한 호르몬은 건강에 문제를 일으킨다. 물론 너무 부족한 것도 문제라는 점에서는 똑같겠지만, 현대사회에 넘쳐나는 영양과 뭔가를 더 팔고자 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특성을 고려하면, 결핍보다는 과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필요할 수 있다. 특히 유방암, 생리 불순, 생리통, 자궁근종, 난소암, 폐경기의 열감 등 여성의 건강에 다양한 문제를 일으키는 에스트로겐의 과다 문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심각해서, 과연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채식을 기피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과일, 채소, 곡물, 콩류의 값어치는 근본적으로 이 식품들이 치즈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 건강 불균형 바로잡기, p78.
책에 따르면, 유제품, 그 중에서도 치즈는 에스트로겐 과다 문제에 있어 최악이다. 생산량 증가를 위해 거의 1년 내내 임신 상태인 젖소에서 생산되는 우유에 에스트로겐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데, 치즈를 만드는 과정에서 에스트로겐 또한 고농도로 농축된다. 직접 섭취한 에스트로겐 외에도 치즈에 포함된 다량의 지방 또한 칼로리 과다로 비만의 위험을 높이는데, 지방 세포는 에스트로겐을 포함한 다양한 호르몬의 생산함으로써 혈중 호르몬 농도를 높이는 데 일조하고, 근육 세포에 끼는 지질은 인슐린 저항성을 높여 당뇨병 등의 위험을 높인다. 게다가 치즈 등의 유제품에는 잉여 호르몬의 배출을 돕는 섬유소가 전혀 없기 떄문에, 호르몬 과다로 인한 문제에 이중, 삼중으로 기여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이 책에서 주장하는 완전 채식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치즈 등 유제품에 대해서만은 최소한 섭취를 줄이거나 끊는 것이 건강을 위해 필요할 것 같다.
"지방을 많이 섭취하는 여성일수록 에스트로겐 수치가 더 높았다. 이 비례관계는 여성이 뚱뚱하든 날씬하든, 포화지방의 출처가 유제품이나 육류든 식물성 오일이든 상관 없이 모든 상황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 건강 불균형 바로잡기, p74.
이건 또 제법 심난한 얘기다. 많은 건강 관련 책에서 올리브 오일과 같은 일부 식물성 오일은 섭취를 권장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의 섭취는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유제품이 체내 에스트로겐 농도에 영향을 주는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으로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종류와 무관하게 지방 섭취량은 여성의 체내 에스트로겐 농도와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한다. 높은 체내 에스트로겐 농도에 의해 증가하는 여러 위험 - 특히 유방암 - 을 고려하면 지방 섭취에 대해서도 경각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서평을 쓰기 위해 내용을 일부 복기해보는 중에도, 진지하게 머리 속으로 채식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책에서는 지금이 채식을 실천하기 너무나 편한 시대라고 말하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그렇게까지 만만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장 집에서조차 어떻게 이걸 실천할 수 있을지 막막한 상황이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회사 식당에서 제공하는 채식주의자용 도시락인데, 일단 평일 점심저녁은 어차피 샐러드나 김밥을 먹고 있었으니 이걸로 대체해보려고 한다. 이틀정도 해 봤는데, 생각보다는 먹을만했다. 다니는 회사가 크고 상대적으로 시스템이 좋은 곳이다보니 얻을 수 있는 혜택이지 싶다. 집에서는 일단 육류 비중이 높은 식단을 조금씩 채식 비중을 높이는 쪽으로 해 보려고 한다. 고기와 치즈를 둘 다 좋아하는 아내는 책 내용을 얘기해줘도 시큰둥하긴 했지만, 우리집 식단은 내가 관리하니까 조금씩 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책에서 쉽게 얘기하는 것과는 달리, 채식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나부터도 완전한 채식을 추구하겠다고 결심하기에는 미련이 남으니까, 주변사람의 동의와 배려를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걸 알았으면 조금씩이라도 실생활에 적용해봐서 손해볼 일은 없으니 조금씩 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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