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부모님은 내가 태어나기 3년 전에 마차 사고로 돌아가셨다."
- 20년 전,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며 만든 동인지에 한 친구가 실은 소설의 도입부.
어떻게 창의적으로 헛소리를 늘어놓을지를 경쟁하던 고등학생 시절의 얘기다. 컴퓨터 동호회를 빙자하여 모인 게임/만화 동호회 친구들과 함께 창작 소설이라든지, 만화 캐릭터라든지, 화투의 비광 그림이라든지를 모아서 동인지를 만들었다. 왜 이걸 만들기로 했는지, 이걸 갖고 뭘 했는지까지는 이제 와서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어느 일본 애니메이션의 미소녀 주인공 그림을, 다른 친구는 인간 복사기 수준으로 필사한 화투의 비광 그림을 그려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던 흐뭇하기만 하지는 않은 기억은 난다. 그리고 또 하나 내 기억에 박혀 있는 기억은, 또 다른 친구가 쓴 헛소리 가득한 판타지 소설의 도입부이다. 염세적인 태도로 아픈 과거를 숨기고 있지만 쿨하고 멋지고 사실 속마음은 따뜻한 주인공이 - 아마도 작가 본인의 이상적 자아상을 투영하지 않았을까? -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였을 터인데, 그 도입부가 가관이었다. 태어나기 3년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는 불운이라니! 이 굉장히 창의적인 헛소리는 당시 우리 모두를 매료시켰고, 30대의 마지막에 '후성유전'의 흥미로운 사례를 읽던 내 기억을 사로잡았다.
"'아버지'라는 그 우스운 단어를 꼭 사용하고 싶다면, 너는 어머님이 드신 동물들과 마신 물까지도 모두 아버지라고 불러야 해."
- 눈물을 마시는 새, 1권, p119.
나의 십대 후반과 이십대 중반을 지배한 키워드 중 하나는 '판타지'다. 그 중에서 아직까지도 갖고 있는 소설의 한 구절인데, 모계 사회를 이룬 '나가'라는 종족이 부계를 부정하는 철학이 드러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대 과학의 도움 없이는 친자 확인을 할 수 없는 남성과 - 내 아이를 가진 여성을 상당 기간에 걸쳐 타인과 격리시키는 비현실적인 시도를 하더라도 성령으로 잉태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확신의 수준을 100%로 만들지 못한다 - 그런 게 없더라도 이를 확신할 수 있는 여성의 차이를 소설적인 상상력으로 극단화시킨 것인데, 이 소설에 빠져 있던 당시에도 제법 흥미로운 개념이라고 생각했지만 '태아 프로그래밍'과 'DNA 메틸화' 등에 후성유전적 변형에 대해 알게 된 지금에 와서 다시 한 번 흥미가 생기는 개념이다.
나는 내가 죽더라도 3년 뒤에 태어날 내 아이의 아버지일 수 있을까?
유전자와 환경, 미생물은 어떻게 '나'라는 존재를 만드는가?
의문을 떠올린 순간에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답은 물론 YES다.
현대 과학은 정자와 난자를 보존함으로써 특정 시점의 내 유전자의 유효기간을 수년 혹은 수십년으로 늘렸다. 나와 내 아내가 정자와 난자를 은행에 보관한다면, 만약의 경우에라도 그 정자와 난자가 시험관에서 수정된 후 대리모를 통해 우리의 생물학적인 자손이 우리가 죽은 후 3년 이후에라도 태어나는 가능성이 생긴다(물론 법적인 문제나, 누가 이것을 원할지의 문제는 제쳐두자). 즉, 그 아이의 입장에서 '내 (생물학적) 부모님은 내가 태어나기 3년 전에 돌아가셨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은 자기 아이가 분명 자신의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남성은 여성만큼 확신할 수 없다."
-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 p210.
이렇게 뻔한 대답이 질문을 떠올린 그 순간 함께 떠올랐음에도 이 질문이 계속 맴돌았던 것은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나가 사회의 극단적 해석이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데 있어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어머니 뿐이라는 이 관점은 현대과학이 유전자에 대해 밝혀낸 사실로 간단하게 반박할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한나 크리츨로우의 <운명의 과학>에서 제시하는 '생물학적 운명론'의 관점에서 보면, 단순히 DNA 염기서열 뿐만 아니라 이게 발현되는 방식이나 정도 또한 '운명'에 가까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부모'로서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생물학적 수준에서도 유전자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가 처해 있는 환경, 습관, 특정한 사건 등이 모두 성세포 단계에서부터 태아가 자궁 속에 있을 때까지, 어머니의 경우는 모유 수유 단계, 더 나아가서는 아이가 겪는 환경과 아이가 축적해가는 미생물총을 통해서 다시 아이의 유전자가 어떻게 발현될지에 영향을 미친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아이가 경험하는 환경, 습관, 사건 등이 다시 아이에게 생물학적인 수준에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유전자를 물려주는 좁은 의미의 '부모'를 어디까지 확장해도 될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많은 부모의 바람을 고려하면, '부모'의 의미 혹은 역할을 가능한 넓게 확장하는 게 필요할 것 같다. 이런 모호하지만 확장된 의미에서 '아버지' 혹은 '어머니'라는 존재를 다시 생각해보면, 이제 눈에 들어오는 말은 이것이다: '너는 어머님이 드신 동물들과 마신 물까지도 모두 아버지라고 불러야 해.'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키나 몸무게, 피부색 등의 신체 외형 뿐만 아니라 식욕, 집착, 기분, 선호, 신념 등 정신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유전자의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 혹은 과장 조금 보태 절대적인 수준이다.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면 정신적인 영역이 포함되는 것이 불편할 수 있지만, 현재까지 과학이 밝혀냈다고 하는 바에 따르면 정신적인 영역조차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 유전자를 물려주는 것이 생물학적인 부모다. 그리고 이 생물학적인 부모는 일정 부분 - 어쩌면 상당 부분 - 내가 물려받은 유전자가 어떻게 발현되는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주 양육자로서의 부모는 양육이나 교육을 통해 추가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생물학적인 운명'의 수준에서 부모의 영향은 굉장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빌 설리번의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은 생물학적인 수준에서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요소들을 탐구한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그 자체, 이 유전자의 발현이 무엇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는 미생물군은 여기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다양한 '나를 나답게' 만드는 요소들을 통해 알아본다. 도입과 마무리 부분에 해당하는 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 나의 입맛과 만나다
- 나의 식욕과 만나다
- 나의 중독과 만나다
- 나의 기분과 만나다
- 나의 악마와 만나다
- 나의 짝과 만나다
- 나의 정신과 만나다
- 나의 신념과 만나다
이미 태어난 내 아이가 내 집에서 먹고 마시는 음식, 물, 공기는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다. 집 밖에서 먹고 마시는 것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겠지. 아이가 부모와 함께 하며 경험하는 수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엄격히 구분되기는 어렵겠지만, 교육의 영역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영역에서의 영향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사고 체계와 신념까지도 생물학적 영역에서 뇌의 특정 연결이 강화되는 형태로 고착화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고, 혹자는 이런 것까지 고민해가면서 부모 노릇을 해야 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앎으로써 늘어나는 고민과 걱정은 무지를 자각하는데서 오는 필요악이다. 마지막 문단을 적으면서 문득 떠오르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봐도, 모르는 건 독이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학습하고 적용해나가는 태도야말로 양육의 영역에서도 유일한 해결책인 듯하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