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비오는 날 수영장에서 책 읽기


명상이란 우산 같은 건가 싶었다.

게으름도 이런 게으름이 없지.. 벌써 반 년이나 흘렀다. 코로나가 한창인 2020년 여름, 사촌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제주도에 내려간 김에 며칠 더 머물면서 여름휴가를 보냈다. 날씨는 흐렸지만 애초에 어디 안 돌아다니고 호텔에만 박혀 있을 참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좋았다. 아내는 제주도 최고라는 짬뽕에, 아이는 간만에 온 수영장에, 나는 간만에 본떼 있게 하는 독서에 모두가 즐거운 휴가였다.

그 와중에 둘째 날이었나? 왠지 몸이 안 좋은 게 아이랑 물에서 더 놀아주다간 감기에 걸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는 수영장 갈 생각에 신이 날 대로 나 있는데 말이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열이라도 나면 큰일이지 싶어 미안하지만 아내한테 아이를 맡기고 나는 썬베드에 앉아서 책이나 볼 참이었는데.. 이런, 날이 꾸무리한 게 언제 비가 와도 할 말 없는 날씨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마음이 심란해질 법한 상황이었는데, 그 날따라 묘하게 마음이 평안했다.
'뭐, 바람도 안 불겠다 아직 비도 내리기 전이니 우산 하나만 챙겨 놓으면 우산 쓰고 책 보면 되지.'
추울지 모르니까 수건도 넉넉히 챙기고, 신나 죽는 아이의 웃음소리를 배경 삼아 책을 펼쳤는데, 역시나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난 자연스럽게 우산을 펼치고 그 밑에서 계속 책을 읽었다.

"마음챙김은 현재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일에 정신이 필리거나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순간에' 존재하는 것, 지금 펼쳐지고 있는 삶을 직접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 당신의 삶에 명상이 필요할 때, p33.
문득 명상이란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우산 하나 챙겨온 덕에 현재에 집중할 수 있었고, 수영장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웃음소리,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 그리고 흥미로운 책을 즐길 수 있었다. 물론 바람이 세게 불거나, 비가 더 많이 오거나, 날씨가 더 춥다면 우산도 도움이 안 됐겠지. 하지만 그 날만큼은 그걸로 충분했다.

인생에서 명상도, 그 날의 우산 같이 언제 흐려질 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도구가 아닐까. 평소에 명상을 통해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그저 관찰하고, 수용하는 연습이 힘든 시기에 휩쓸리지 않고 현재를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이 책을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격은 배움의 과정에서 저지를 수 있는 실수는 거의 다 저질러봤다는 데 있다."

- 당신의 삶에 명상이 필요할 때, p23.

<당신의 삶에 명상이 필요할 때>의 저자인 앤디 퍼디컴은 불가에 귀의하여 명상 수련을 전문적으로(?) 하다가, 사람들에게 명상의 혜택을 알리는데 종교색이 걸림돌이 된다는 판단에 속세로 돌아온 인물이다. 책에서 그는 여러 사찰에서 다양한 방식과 스승들에게 배운 명상의 기법들, 그리고 본인도 강조하듯 풍부한 실패의 경험들을 통해 명상을 처음 시도해보는 사람들이 참고할만한 팁과 주의점들을 다양하게 알려 준다.

아래는 책으로만 명상을 배우고 시도해보는 과정에서 참고가 됐던 비유들이다.


관찰자

"'이렇게 한 번 해보거라. 혼잡한 도로로 뛰어들어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애쓰지 말고 네가 앉아 있는 곳에 잠시 그대로 있어 보는 게 어떻겠니?'"

- 당신의 삶에 명상이 필요할 때, p65.

고속도로에 달리는 차들이 내 생각과 감정이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은 내 마음대로 제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은 고속도로 변에 앉아서 그저 어떤 차들이 지나가는지 관찰하자. 끌리는 것도, 피하고 싶은 것도 있겠지만 관찰자인 나를 어떻게 하지는 않고 그저 지나간다. 굳이 뛰어들어 흐름을 망치거나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지는 대신 한 발 물러나서 그저 지켜보는 연습을 함으로써 반응과 대응의 간격을 가질 수 있다.


푸른하늘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창출해낼 필요가 없다. 푸른 하늘은 곧 헤드스페이스이고, 그것은 언제나 그곳에, 아니 이곳에 존재한다."

- 당신의 삶에 명상이 필요할 때, p75.

책에서 '헤드 스페이스'라고 부르는 명료한 마음은 이미 우리에게 있다. 비구름과 같은 혼란한 생각과 감정들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 명상을 통해 애써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안 되는 것에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저 믿고 - 이게 제일 어렵지 않나 싶지만, 묵묵히 수행하다보면 점점 더 구름 위의 푸른 하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야생마

"따라서 그 야생마, 그 거칠게 날뛰는 마음과 함께 앉아 있을 때에는 그것이 자유롭게 나돌 수 있는 공간부터 내줘야 한다."

- 당신의 삶에 명상이 필요할 때, p80.

고속도로를 달리는 온갖 자동차를 멈춰세우려 하지 않듯이, 날뛰는 야생마를 당장 붙들어매려고 하지 마라. 생각과 감정이란 야생마와 같아서, 조금씩 조금씩 묶인 줄의 길이를 줄여나가야 결국에 잠잠해지게 할 수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단연코 이 책이다. 샤우나 샤피로의 <마음챙김>. 이 책 덕분에 나는 반년을 묵힌 서평을 드디어 쓸 수 있게 되었고, 명상을 하루일과에 포함시켰다. 누구든 과학의 힘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 예를 들어 (지구) 편평이들은 안될 것이다! - 대체로 이 책을 통해 명상의 유익함에 대해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당장 나아지는 것 같지 않더라도 묵묵히 수행하는 것. 이 때는 다시 <당신의 삶에 명상이 필요할 때>가 더 나은 우산을 손에 쥘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다음은 <마음챙김>을 읽고 썼던 서평 링크: 더 이상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그저 다들 고요한 마음의 경험을 한순간도 지체할 수 없다는 식으로 서둘렀다."
- 당신의 삶에 명상이 필요할 때, p20.

좋은 책 두 권 읽고 일주일 명상 좀 깨작거렸다고 당장에 큰 변화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음챙김 수행의 혜택을 알고 있으니, 그저 묵묵히 해 나가면 될 뿐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음챙김을 통해 더 편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각자의 우산을 갖기 바란다.

댓글

  1. 묵은 서평이니 만큼 발효되어 유익하네요.
    애쓰셨습니다

    답글삭제

댓글 쓰기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차멀미가 날 때는 앞을 봐야 한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가족 여행을 가면 나는 꼭 어디에 도착해서야 잠에서 깨곤 했다. 그 때마다 조수석의 어머니께서는 좋은 경치는 하나도 못 보고 밥 먹을 때만 일어난다고 핀잔을 주곤 하셨는데, 아무리 깨어 있으려고 해도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난 여지 없이 곯아떨어졌다. 성인이 된 후에 생각해보니 그 시절의 나는 차멀미를 했던 것이었다. 멀미라는 건 눈과 귀 - 정확히는 전정기관 - 에서 감지되는 움직임에 대한 정보 불일치를 뇌가 불편하게 느끼는 현상이라고 이해하면 얼추 맞을텐데, 차에서 스마트폰을 볼 때 속이 더 메슥거리거나, 운전자는 멀미를 하지 않는 걸 생각해보면 된다. 차멀미를 할 때는 먼 산을 보라거나,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마시라거나 하는 민간요법이 전해지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다 소용 없는 일이다. 달리는 차 창문을 열고 머리 날리게 바람을 맞으면서 볼 것도 없는 먼 산을 아무리 노려보고 있어도, 멀미는 잦아들지 않았다. 조수석에라도 앉을 수 있다면 좀 나았겠지만 조수석에 갈 짬은 전혀 아니었으니 가장 확실히 멀미를 피하는 방법은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는데, 이걸 어느 정도 인지한 다음에는 메슥거림이 느껴질 때는 일부러 눈을 감고 잠드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아마 이 기전이 몸에 쌓이면서 차만 타면 자는 식으로 몸이 반응한 게 아닐까.  ""과학의 속도가 윤리적인 이해 수준을 넘어서면, 사람들은 각자가 느끼는 불편함을 표현하느라 애를 먹게 된다." 2004년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쓴 글이다." - 유전자 임팩트, p620. 어른이 되면서 멀미 자체에 대한 민감도도 떨어진데다 이제는 어디 갈 때 거의 운전석에 앉기 때문에 멀미에 시달릴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급변하는 세상과 기술의 발전을 보고 있으면 가끔 속이 울렁거릴 때가 있는데, 이럴 때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케빈 데이비스, " 유전자 임팩트 ...

6살짜리 아이에게 지수 개념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내 6살짜리 아이에게 얼마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큰 수는 '백천무한'이었다. 아직 하나하나 차근차근 세어 나가면 100 넘게도 셀 수 있긴 하지만, 여전히 68 다음은 뭐냐고 물으면 '13?' 이렇게 아무 숫자나 생각나는대로 얘기하는 게 아이의 수준인데, 백 다음에는 천이 있고, '무한'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는 걸 어디서 줏어들은 모양인지, '엄청 많다'는 얘기는 모두 다 '백천무한개'로 퉁치던 게 불과 한두달 전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녀석이 '조'라는 게 있다던데, 이러면서 또 아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파온다. '억'이라는 단위가 있는 줄도 모르는 아이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나? 일단 '만'과 '조' 사이에는 '억'이라는 게 있다고 설명은 해 줬는데, 사실 '만'과 '조' 사이에는 '억' 말고도 '십만', '백만', '천만'도 있고, '십억', '백억', '천억'도 있으며, 조 다음도 같은 모양이로 계속 늘어난다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해주면 되지? "또한 우리는 모두 머리 속에 일종의 숫자 선, 즉 마음 속 숫자 축을 갖고 있어, 계산할 때 그 축 위에서 움직이는 법을 배운다." - 우리의 뇌는 어떻게 배우는가, p208. 나름 고등교육을 받아서, 실수 축과 허수 축, 도메인 전환과 같은 개념을 섭렵한 아빠와 달리 이제 6살인 아이는 실수 축에서 정수, 그 중에서도 자연수 영역의 일부에 대해서 이런 심상을 만들어가야 하는 단계인데, 여기서 1씩 세기로 가기에는 억이니 조니, 너무나 험난한 영역의 얘기인 것이다. "놀랍게도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2차원 지도상에서 데이터를 나타내는 걸 배울 때 이 영역이 활성화된다. 그 데이터가 공...

더 이상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 "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 김영사, 2001. 하도 오래 전이라 확신은 없지만, 시작은 이 책이었던 것 같다. '깨어있음' 혹은 '알아차림'이라는 개념을 마음 한 구석에 가지기 시작했던 것은. 거의 20년 전에 - 출간년도를 확인해보니 2001년이다 - 읽었던 책이라 각론이든 총론이든 아무 것도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표지 사진 속 아이의 얼굴과, 무엇을 하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상태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개념만은 기억 속에 박혀 있었다. 이 '알아차림'이라는 개념은 시간이 흘러 '마음챙김(mindfulness)'이라는 개념으로 다시 다가왔다. 어떻게인지는 모르겠지만 페이스북 알고리즘이 나에게 마음챙김 운운하기 시작한지도 몇 년은 된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고 스스로 더 나아지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읽은 많은 책에서도, '명상' 혹은 '마음챙김'의 혜택을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위 비판적인 사고를 하는 나는, 적극적으로 마음챙김을 실천하기 위해 시간을 내기에는 그 혜택이 명확하지는 않은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며 적극적으로 마음챙김 수행 혹은 명상이라는 것을 시도해보지 않았다. 핑곗거리를 잃어버리다 샤우나 샤피로, " 마음챙김 ", 안드로메디안, 2021. "심리적, 인지적, 신체적 건강 영역에서 마음챙김 수행의 중요한 이점을 확인해준 연구는 수 없이 많다." - 마음챙김, p81. 이건 뭐 '닥치고 해봐야 되는' 수준이다. 이렇게나 다양한 혜택이 수많은 연구결과를 통해 뒷받침되고 있을 거라고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책에서 소개한 이점들에 붙어 있는 참고문헌과 각 인용 수 및 수록된 저널의 영향력 지수 를 정리해봤다(인용은 Google Scholar 검색시점 기준, 영향력 지수는 Wikipedia 기준). 내가 이걸 왜 시작했지...ㅡ.ㅡ; 심리적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