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남의 결혼식에서 내 결혼을 돌이켜보다


결혼식이라는 건 대게 준비하는 당사자들에게는 의미가 넘치지만 사람들은 남의 결혼식에 별 관심이 없는 법이다. 더구나 지금 같은 코로나 시국에서는, 청구서 처리하듯 간편송금 서비스로 청첩장을 처리하는 게 더 익숙한 것도 같다.

그런데 지난 주말, 부서에 새로 들어온 후배 결혼식에 참석했는데(마땅히 참석할 자리긴 했지만, 시기가 시기니만큼 제법 고민을 했다), 이게 괜히 감흥이 일고 의미 부여가 되는 것이 묘한 느낌이었다.


벨린다 루스콤, "결혼학개론", 비잉, 2021.

결혼식에 참석하려 이동하는 중에 읽었던 꽃분홍색 표지의 책 때문이었을까? 묘하다고 생각하며 마음이 움직이는 걸 관찰하다가, 문득 열흘 뒤면 결혼 10주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강산이 변한다는 10년간, 아내와 나는 제법 잘 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부부로서 아이를 키우며 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이 쉽다고는 못하겠다. 아마도 나와 10년의 간격을 두고 결혼하는 후배가 아내와 맞이할 10년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묘한 감정을 일으켰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상대에게 미칠 듯 화가 나는 이유는 원래 그 상대에게서 좋아했던 점들과 관련이 있다."
- 결혼학개론, p38.
간만에 정장 차려입고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중에 차마 손에 당당하게 들고 다니지는 못했던 꽃분홍 표지의 책, 벨린다 루스콤의 <결혼학개론>은 첫 번째 장을 익숙함의 문제를 지적하며, 이를 인지하고 극복하기 위해 오래된 부부일수록 조금씩 색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보통의 결혼생활은 가장 화려한 행사인 결혼식을 시작으로, 점차 배우자와 함께하는 긴 여정을 기념하는 빈도가 줄어든다. 물론 10주년이라든지, 25주년이라든지 하는 굵직한 숫자는 더 크게 기념하긴 하지만, 어느 쪽이든 0주년의 화려함에는 비할 바는 아니지 싶다.


"어떤 바보라도 1년은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신혼여행의 추억만으로도 3년은 버틸 수 있다. 결혼기념일 선물이 정말로 필요한 시점은 15년째부터이다."
- 결혼학개론, p9.

후배가 세상 화려하게 결혼 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 한구석에서 10주년을 앞둔 내 결혼생활을 돌아봤다. 연애시절부터 지속 불가능한 정성은 처음부터 쏟지 않겠다며 아내를 섭섭하게 하는 만용을 부렸고, 결혼 생활 내내 어차피 오고 또 올 기념일 빡세게 챙길 거 있냐며 비협조적으로 굴었는데, 고맙게도 아내는 잠깐의 투덜거림 외에는 대체로 내 태도를 수용해주었다. 돌이켜보면 이런 태도가 익숙함이 갉아먹는 색다름의 낙차를 줄여줬던 건가 싶긴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기념일도 챙기고 아이 없는 데이트도 더 종종 계획해야겠다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결혼식장 근처 유명한 빵집에 들러서 아내와 아이가 좋아하는 빵을 조금 사고, 돌아가는 버스에서 건강한 싸움의 기술에 대한 챕터를 읽었다. 운전 중에 싸우는 것이 왜 위험한지, 왜 내가 그 때 그런 충동에 휩싸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알았으니 최소한 운전 중에 싸우는 일은 적극적으로 피해야겠다.


결혼생활에서 익숙함의 문제와 부부간의 건강한 싸움의 기술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결혼 생활에서의 리스크를 많이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선택한, 그리고 나를 선택해준 배우자와의 백년해로를 다짐하며 결혼생활을 시작한 게 아닌가. 행복하고 지속 가능한 결혼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책 한 권 읽고 몇 가지를 돌이켜보는 정도의 수고로움은 충분히 좋은 투자가 아닐까. 이에 더해 이 책은 돈, 육아, 섹스의 문제 및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법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우리 부부를 비롯해 많은 부부와 예비 부부들이 이 책을 통해 건강한 결혼 생활에 대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한 부분에 결혼, 혹은 그에 준하는 동반자적 관계를 올려둔 모든 분들께 강력히 일독을 권한다.

이번에 결혼한 후배에게도 이 책을 선물로 줬는데, 결혼식에서 보여준 밝고 행복한 모습을 일상의 소소함 속에서도 이어나가갈 수 있길 바란다.

댓글

  1. 소소한 일상을 바꾸는 행복이 책과 함께 했다면, 큰 교훈을 얻은 것이겠네요 ^^ 잘읽고 갑니다.

    답글삭제
  2. 작성자가 댓글을 삭제했습니다.

    답글삭제

댓글 쓰기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외국보다 한국 초코파이가 초코 함량이 더 높은 이유

여느 몹쓸 공돌이 개그  언젠가 돌아다니던 초코파이 초코 함량 계산식. 답은? 무려 약 31.8%다. 이 정도면 빈츠보다도 높은 함량일지도.. 자고로 무릇 공대생 혹은 공돌이라 하면 '일반인' - 여기서는 비 공대인 -이라면 알 필요도 없는 기호로 범벅이 된 수식을 붙들고 밤을 샌다든지, 거기서부터 파생된 온갖 과제를 하느라 밤을 샌다든지,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들끼리' 머리를 싸메고 수시로 밤을 새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밤을 샌다는 건 낮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고 곧 '일반인'들과의 소통의 기회가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다보면 시나브로 쌓이는 전공 지식과 함께 '바깥 세상'에 대한 환상 그리고 '일반인'들과의 유머적 단절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씩 키우게 되는데, 이런 것들을 비틀어 탄생한 것이 공대 개그 혹은 공돌이 개그이다. 예를 들어 '외국보다 한국의 초코파이가 초코 함량이 더 높은 이유'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면 당신도 훌륭한 공돌이일 가능성이 높은데(힌트는 위 수식을 영어로 바꿔보라는 것이고, 답은 마지막에..), 무릇 공돌이라 하면 이렇게 공돌이를 위한 개그를 이해하고 웃을 수 있는 소양을 갖추게 되고, 일반인들은 해설이 있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개그까지도 즐기면서 모종의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에, 다시 일반인들과의 유머적 단절은 더 공고해진다. 이런 거에 웃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다. - 출처: 나무위키 ' 공대개그 ' 페이지. 나 또한 정통한 공돌이로서 - 입사 전까지 같은 건물에 10년을 들락거렸다! - 유사한 과정을 거쳤고, 일요일 밤을 지배하던 주류 개그는 1도 모르지만 각종 공돌이 개그에는 피식거리는 단계에 도달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이런 상황에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질량이 없는 물질'만 만날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 날로 있는...

차멀미가 날 때는 앞을 봐야 한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가족 여행을 가면 나는 꼭 어디에 도착해서야 잠에서 깨곤 했다. 그 때마다 조수석의 어머니께서는 좋은 경치는 하나도 못 보고 밥 먹을 때만 일어난다고 핀잔을 주곤 하셨는데, 아무리 깨어 있으려고 해도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난 여지 없이 곯아떨어졌다. 성인이 된 후에 생각해보니 그 시절의 나는 차멀미를 했던 것이었다. 멀미라는 건 눈과 귀 - 정확히는 전정기관 - 에서 감지되는 움직임에 대한 정보 불일치를 뇌가 불편하게 느끼는 현상이라고 이해하면 얼추 맞을텐데, 차에서 스마트폰을 볼 때 속이 더 메슥거리거나, 운전자는 멀미를 하지 않는 걸 생각해보면 된다. 차멀미를 할 때는 먼 산을 보라거나,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마시라거나 하는 민간요법이 전해지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다 소용 없는 일이다. 달리는 차 창문을 열고 머리 날리게 바람을 맞으면서 볼 것도 없는 먼 산을 아무리 노려보고 있어도, 멀미는 잦아들지 않았다. 조수석에라도 앉을 수 있다면 좀 나았겠지만 조수석에 갈 짬은 전혀 아니었으니 가장 확실히 멀미를 피하는 방법은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는데, 이걸 어느 정도 인지한 다음에는 메슥거림이 느껴질 때는 일부러 눈을 감고 잠드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아마 이 기전이 몸에 쌓이면서 차만 타면 자는 식으로 몸이 반응한 게 아닐까.  ""과학의 속도가 윤리적인 이해 수준을 넘어서면, 사람들은 각자가 느끼는 불편함을 표현하느라 애를 먹게 된다." 2004년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쓴 글이다." - 유전자 임팩트, p620. 어른이 되면서 멀미 자체에 대한 민감도도 떨어진데다 이제는 어디 갈 때 거의 운전석에 앉기 때문에 멀미에 시달릴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급변하는 세상과 기술의 발전을 보고 있으면 가끔 속이 울렁거릴 때가 있는데, 이럴 때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케빈 데이비스, " 유전자 임팩트 ...

6살짜리 아이에게 지수 개념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내 6살짜리 아이에게 얼마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큰 수는 '백천무한'이었다. 아직 하나하나 차근차근 세어 나가면 100 넘게도 셀 수 있긴 하지만, 여전히 68 다음은 뭐냐고 물으면 '13?' 이렇게 아무 숫자나 생각나는대로 얘기하는 게 아이의 수준인데, 백 다음에는 천이 있고, '무한'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는 걸 어디서 줏어들은 모양인지, '엄청 많다'는 얘기는 모두 다 '백천무한개'로 퉁치던 게 불과 한두달 전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녀석이 '조'라는 게 있다던데, 이러면서 또 아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파온다. '억'이라는 단위가 있는 줄도 모르는 아이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나? 일단 '만'과 '조' 사이에는 '억'이라는 게 있다고 설명은 해 줬는데, 사실 '만'과 '조' 사이에는 '억' 말고도 '십만', '백만', '천만'도 있고, '십억', '백억', '천억'도 있으며, 조 다음도 같은 모양이로 계속 늘어난다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해주면 되지? "또한 우리는 모두 머리 속에 일종의 숫자 선, 즉 마음 속 숫자 축을 갖고 있어, 계산할 때 그 축 위에서 움직이는 법을 배운다." - 우리의 뇌는 어떻게 배우는가, p208. 나름 고등교육을 받아서, 실수 축과 허수 축, 도메인 전환과 같은 개념을 섭렵한 아빠와 달리 이제 6살인 아이는 실수 축에서 정수, 그 중에서도 자연수 영역의 일부에 대해서 이런 심상을 만들어가야 하는 단계인데, 여기서 1씩 세기로 가기에는 억이니 조니, 너무나 험난한 영역의 얘기인 것이다. "놀랍게도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2차원 지도상에서 데이터를 나타내는 걸 배울 때 이 영역이 활성화된다. 그 데이터가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