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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올바르게 키워낸다는 것

요시노 겐자부로,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양철북, 2012.


이런 책을 100년 가까이 전에 쓰다니, 일본이라는 나라가 대단하긴 하구나 싶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군국주의가 판을 치던 시절의 1937년에 발간된 요시노 겐자부로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다음 세대에게 올바른 사상을 전달하려고 기획된 16권의 '일본 소국민 문고' 중 마지막이자 가장 근본적인 사상을 담은 책으로 출간되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의 입장에서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얘기일 수 있지만, 스스로 이룩한 성취에 취해 패전으로 막을 내린 태평양 전쟁으로 달려가던 당시 일본 사회 속에서도 인본주의와 긴밀히 연결된 세계, 내면의 양심 등의 가치를 역설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2021년에 와서도 전혀 흐려지지 않은 것 같다. '코페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15살, 중학교 2학년생인 혼다 준이치가 친구들과의 일화, 외삼촌과의 대화, 내면의 성찰을 통해 세상과 자신에 대한 인식을 형성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 책은, 세상을 이루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성 및 흐름, 요즘 말로 글로벌 밸류 체인으로 연결된 세상에서 시장과 분업이 만들어내는 진보, 빈부 격차와 이에 따른 사회 정의의 문제, 신의와 용기와 반성과 용서의 문제 등을 자연스럽게 풀어낸다. 이런 과정 속에서 혼다 준이치는 그의 별명의 기반이 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사람들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과 같이,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는 아이의 관점에서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겪는다.

중2병, 질풍노도의 시기 등으로 대변되는 시절에, 코페르의 인식을 넓혀주는 것은 외삼촌이다. 코페르의 외삼촌이 코페르에게 쓰는 편지 형식의 노트를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코페르를 훌륭한 인격체로 키워내겠다는 좋은 의도, 코페르의 감정을 살피고 적절한 감정적, 지적 자극을 통해 코페르의 성장을 이끌어내는 세심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글쓰기가 갖는 힘을 느낄 수 있다. 외삼촌과의 대화, 외삼촌의 노트를 통해 코페르는 세상과 자신의 관계, 친구들과 자신의 차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에 대처하는 방법들을 알아가고, 무엇보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이 느낀 바를 기록하고 곱씹음으로써 스스로를 더 알아가는 핵심 습관을 기른다.

이 모든 게 요시노 겐자부로와 그 동료들이 당시의 청소년들에게 심어주고자 했던 가치였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말년의 마지막 장편 작품의 원전으로 이 책을 택한 이유인 것 같다([미야자키 월드]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내가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은 가치이고, 내가 이 글을 포함해 꾸준히 책을 읽고 글을 남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100여년의 시차로도 흐려지지 않는 가치를 쉽게 전달하는 좋은 책이고, 내 아이가 코페르의 나이쯤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발견하고 읽을 수 있도록 책장 한 자리에 둘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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