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장편
<이웃집 토토로>에서 넷플릭스를 거쳐, 나무위키를 헤매다가 여기에 도달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장편. 이미 몇 차례 은퇴를 번복한 그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 될 거라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살 거냐니, 제목부터 묘하게 훈수를 두는 느낌이다. 내가 스튜디오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제법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또 대단한 팬심이 있지도 않아서 평소 같으면 감흥 없이 스쳐지나갔을 제목이다. 그런데 나는 왜 굳이 이 제목을 붙들고 어렵게 글까지 쓰고 있는 것일까?
미야자키 월드
"미야자키는 당시를 떠올릴 때마다 가족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부유하게 살았다는 죄책감, 부모가 여자와 아이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분노를 비롯해 갖가지 감정이 뒤엉킨다."
- 미야자키 월드, p46.
1941년생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던 시절을 기억하고 패전 후의 일본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개인적으로는 제법 나이가 있나보다는 했지만, 이제 80살이나 됐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이 대여섯 살 무렵인 걸 감안하면, 전쟁 말미에 미군의 공습에서 피난하던 기억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친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그의 기억에서 우리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비현실적인 아이를 발견한다."
- 미야자키 월드, p47.
그의 가족은 군수 업체를 운영하던 큰아버지와 아버지 덕에 다른 사람들보다 풍족했고, 그 돈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수월하게 공습의 위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했다.
그 나이의 아이에게 있어 부모의 존재는 어지간하면 슈퍼맨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아이가 형성하는 도덕률의 잣대 그 자체. 철이 들고 봄을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부모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그토록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 부모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외면한 기억을 돌이킬 때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상상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우쓰노미야에서 한밤중에 벌어진 끔찍한 혼란과 상실을 축소하지 않는다. 대신 책임감, 공동체 의식, 용기가 제 역할을 하는 인류애적 상호작용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 미야자키 월드, p48.
이런 극히 부정적인 사건을 겪고 성장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얘기하고, 묵묵히 견디는 인내와 수용의 미덕을 이야기하며,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츠키는 (아마도 결핵으로) 입원한 엄마 대신 가족의 아침밥을 챙기며 네 살배기 동생 메이의 엄마 노릇을 한다.
나우시카는 자연과 교감하며 인간 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 곤충까지 끌어안는다.
센은 돼지로 변한 부모를 구하기 위해 부모에게 마법을 건 온천장에 몸을 의탁한다.
마르코는 돼지로 살지언정 파시스트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미야자키 월드는 현실의 부조리와 고통, 그 수용과 인내와, 그리고 희망으로 채워진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라는 이 메시지는 사람들이 허무에 빠져 있던 1990년대 미야자키가 절실하게 매달린 신념이다. 두 번째는 '구름 끼지 않은 눈으로 보는 것'이다."
- 미야자키 월드, p325.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삶과 세계에 대한 관점을 곱씹어보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의 마지막 작품에 녹여낼 메시지를 자연히 기대하게 된다. 그 정도의 거장이 '손자가 자랑스러워할만한 작품'을 목표로 제작기간의 제약 없이 작업한 결과가 사뭇 훌륭할 것이라는 건 별다른 의심의 여지는 없지 싶다. 리스크라면 고령과 건강 정도가 아닐까.
긴 제작기간은 곧 많은 비용인데, 이 비용을 대기 위해 스튜디오 지브리는 스트리밍을 지양하던 지금까지의 노선과 달리 넷플릭스와 손을 잡았다고 한다. 덕분에 나도 아이에게 <이웃집 토토로>를 보여줄 수 있었고, 앞으로 그의 작품을 하나씩 보면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을 기다리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사뭇 철학적인 제목의 이 작품을 더 진지하게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세계와 그 속에 녹아 있는 그 메시지이다. 훌륭한 작품에도 좋은 해설이 붙어야 그저 아름답고 잔잔한 걸 넘어 울림과 곱씹을거리가 명확해지는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는 이 책이 딱인 듯하다. 수전 네이피어의 <미야자키 월드>. 전문가가 팬심을 담아 연구를 하면 이런 게 나온다! 이 책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창조해낸 다양한 작품 세계를 하나의 관점에서 묶어내고, 각 작품 속 의미를 명확하게 알려준다.
나는 이 책 덕분에 넷플릭스 1달 무료체험을 시작했고, 아이와 함께 20여년 만에 본 <이웃집 토토로>를 보면서 때때로 눈시울을 붉혔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을 기대하며 기다리게 되었다. 그의 작품 몇 편이라도 재밌게 봤던 사람이라면, 그리고 세상과 삶에 대해서 진지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그 작품 세계을 한층 깊이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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