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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친구, 그리고 일

'떳떳한 사람이고 싶다.'
누군가는 더 이상 미혹되지 않는다는 나이를 앞두고, 내 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실패하지 않는 실패만을 쌓아 온 내가 최근에서야 발견한 내 바람이다. '꿈' 같은 거창한 것 말고, 흘러가는 시간 아까운 줄 모르고 어찌할 수도 없는 부조리에 열만 올리다가 문득 내가 그 부조리의 한 부분이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이후로 쫓기듯 살다 보니 어느덧 구체화된 내 바람.

'리더가 되어야 리딩을 하지.'
내가 기여했다고 생각한 것에 비해 박한 고과를 받아든 고과 면담 자리에서 부서장으로부터 '상위 고과를 받으려면 동료들을 리딩할 수 있어야 한다,' 는 피드백을 받고 그 시절의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그 때 그 부서장이 대단한 통찰을 갖고 한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찌 됐건 그 말 자체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리더의 위치에 있지 않더라도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고, 팔로워의 위치에 있을 때 팔로워십과 함께 리더십을 키워두지 않으면 정작 리더의 위치에 올라갔을 때 한 없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준비된 사람에게 기회가 오는 법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연공서열제인 조직에서는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리딩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리더가 곧 조직의 부조리를 만들에 내는 원인의 하나일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가장 비참한 것은 쓰일 데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중 누군가는 소중한 줄도 모르고 낭비하는 것을 넘어 주변을 망치는 데 사용하는 '기회'라는 것은, 분야는 다르지만, 조선시대의 서출들에게는 꿈에서조차 주어지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백동수는 치열하게 준비했고 기회가 왔을 때 그 역량을 마음껏 펼쳤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무인인 백동수는 조금 다르지만) 그들에게는 꾸준히 걸어간 책이라는 길이 있었고,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교감하고 우정을 나눈 친구들이 있었고, 학문의 길을 이끌어주고 더 넓은 관점을 제공해준 스승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서로 만날 수 있게 해 준 백탑이라는 공간과 평판이라는 유대가 있었다. 그리고 정조의 개혁 정치라는 운이 있었다. 지금 시대에 성공의 요소로 언급되는 실력, 유기적 연결, 시너지, 운이 이들의 사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안소영, 2005,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 보림출판사


안소영 작가의 "책만 보는 바보"는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의 눈으로 바라본 책과 벗, 스승, 그리고 서출 선비로서의 삶과 관리로서의 삶을 잔잔한 문장으로 풀어낸 책이다. 책과 학문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추구, 서출이라는 사회적 감옥에 갇힌 처지에 대한 막막함, 책을 통해 처지의 차이를 넘어 진정한 벗을 만나는 과정, 책을 통해 교류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것을 넘어 더 높은 수준으로 발돋움하는 과정, 그 과정 속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과 그 앞에 무엇이 있는지 제시해준 스승들, 생각지도 못한 기회를 맞아 관리로서 그 동안 쌓아온 역량을 쏟아낸 시간들, 그 밑바닥에서 주군과 공유하는 백성의 삶과 나라의 미래를 위한다는 가치가, 이덕무의 생각과 말과 글을 빌어 서정적으로 그려진다.

"이기적 이타주의자를 키우고자 하는 독서 모임의 첫 번째 책"
나는 이 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했는데, 책이 꽂혀있던 서가가 '유아, 어린이 > 공부법'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평소에 구입하는 책들과는 거리가 있는 분야의 서가에서 책을 집어드는 경험이 조금 생소하다는 느낌만 가지고 있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 이 책이 일반적으로 어떠한 맥락에서 추천되었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1) 조선 후기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책, 2) 이야기의 형식으로 정조의 탕평책과 주요 실학자들의 역할을 쉽게 설명하는 책, 3) 그러면서도 문장이 유려하여 읽기에 좋은 책, 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실제로 이 세가지 모두 이 책의 장점으로 꼽기에 무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하면 떳떳한 삶을 살아낼 수 있을지가 지상 관심사인 나에게는 1) 꾸준한 노력을 통한 실력의 향상, 2) 비슷한 관심과 목표를 가진 서로 다른 사람들이 협업하며 발생하는 시너지, 3) 결과를 내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운적 요소가 시대와 무관하게 보편적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거기에 책의 주인공들이 공유한 이타적인 가치에 공감하게 될 수 있다는 가치가 더해지면서, 이 책이 <씽큐ON>이라는 이기적 이타주의자를 키우고자 하는 독서 모임의 첫 책으로 선정된 것이 더없이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감히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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