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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후회 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부모님이 두 분 다 살아 계시는 너희는 절대 몰라."
1년에 한두 번 모이는 친구들과 술 한잔 하며 재테크에 대한 얘기에 열을 올리던 중이었다. 한 친구가 자기는 너무 정신없이 일만 해서 누가 처음부터 끝까지 돈을 어떻게 관리하면 좋을지 '정답'을 알려주면, 아니 아예 누가 알아서 돈을 관리해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누가 봐도 헛된 기대라 거기 있던 모두가 저마다의 생각을 꺼내 놓기 시작했는데, 이야기가 흘러 흘러 그 친구가 어머니에게 최선을 다 하고 싶은 마음에 지출이 통제가 안 되는 상황과, 그 이면에 얼마 전에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께 그리고 그 간병 과정에서 고생하신 어머니께 더 잘 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죄송스러운 마음이 크다는 내용으로 이어졌다. 들어보니 능력 있는 프리랜서 통·번역사인 그 친구가 번아웃을 염려해야 될 정도로 일해서 번 돈의 상당 부분이 미래에 대한 준비보다 현재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한 소비에 쓰이고 있는 상황이었고, 본인도 그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걱정이 된 다른 친구들이 그 부담을 어머니께 솔직히 말씀드리고 소비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게 먼저가 아니겠냐, 일을 하는 양도 조금은 줄이는 게 어떠냐 등의 의견을 냈는데 거기에 대한 그 친구의 대답이 이 말이었다.

그렇다. 무리가 되더라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어머니께 최대한 잘 해드리고 싶은 친구의 절박함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방법은 우리에게 없었다. 물론 만에 하나 내가 그 친구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그 친구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 친구의 대답이 논리적으로 적절치는 않았지만, 어찌 됐건 이것 한 가지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어머니도 언젠가 떠나실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아버지가 떠나신 다음 느끼는 후회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 하고 있었다.

"애통 과정에는 늘 후회가 따른다.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없으니까. 애통은 후회하는 마음이다."
-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p274.
이야기를 시작한 처음에는 적당한 시점에 그 친구에게 좋은 경제 책을 추천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홍춘욱 박사의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같은. 하지만 그 친구의 말에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발견했다고 느낀 순간 경제 책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어 버렸다.
내 느낌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 친구는 이미 경제학에서 말하는 소위 '합리적 인간'의 요소를 상당 부분 잃어버린 상태였으니까.

"이 책은 그런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오로지 죽음을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을 다룬다."
-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p32.
샐리 티스데일, 2019,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비잉(Being).

경제 책을 대신해 이 친구에게 선물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느낀 책은, 원제가 '미래의 시신들을 위한 조언(Advice for Future Corpses)'인 '죽음'에 관한 책이었다. 멀쩡히 살아 계신 어머니와 자신이 어떻게 잘 살아갈지가 고민인 친구에게 죽음을 대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책이라니! 이 생각을 떠올린 그 순간부터 모임이 끝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몇 일 사이에도 어떻게 하면 이 친구가 상처 없이 내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 책의 어떤 부분이 정말로 이 친구에게 도움이 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얼마 전에 쓴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후회 없이 보낼 수 있을까?>라는 글에서 언급한 '다음 글'의 주제가 정해졌다.

어떻게 해야 후회 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적어놓고 보니 너무나 어려운 질문이다. 과연 내가 여기에 대한 오답이라도 낼 정도로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봤을까? 그래도 최소한 내가 내 삶과 죽음의 주체이고 최고 전문가라는 사실 하나를 믿고, 이런 의심까지도 싸짊어지고 '나'라는 사람으로부터 보편적인 가치를 쥐어짜본다.

내가 사고나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죽지 않는다면 나는 아마도 양가 부모님 네 분의 죽음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아마도 한 분 한 분 떠나보낼 때마다 나도 후회에 빠져 허우적대겠지. 그렇다면 무엇이 내 후회를 줄여주고, 무엇이 날 후회를 안아 들고 빨리 일어서게 해 줄 수 있을까?

후회를 줄여주는 것

후회를 줄여주는 것은 지난 날 나로 인해 부모님이 느낀 행복에 대한 인지, 혹은 믿음일 것이다. 내가 내 아이의 수 많은 말썽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웃음 한 번, 천사같이 잠자는 모습, 무럭무럭 성장하는 것에 훨씬 더 큰 행복을 얻는 것처럼 내 부모님도 나로 인해 얻은 행복을 더 크게 기억하실 것이다. 이는 단지 어린 시절에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고, 부모 자식 간에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리라 생각한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식이 잘 되는 것이 큰 행복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자식이 부모에게 감정적으로 잘 한다면 금상첨화겠지. 경제적으로도 잘 한다면? 당연히 더 좋겠지만, 이건 앞의 두 가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가치가 덜 하다는 데 이견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 명제가 그 친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면, 어머니를 위한 과한 소비가 그 친구의 미래나, 혹은 현재를 위협할 때 과연 그 소비의 결과가 어머니한테 그 친구에 대한 걱정을 덮을만한 행복을 줄 수 있을까?

"어떤 환자는 남은 가족의 안위가 걱정돼 쉽게 눈을 감지 못하기도 한다."
-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p188.
임종 직전의 환자만 그럴까? 딱히 죽을 날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부모라면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법이다. 하물며 자랑스러운 내 아이가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쫓기듯 일을 하고, 현재를 갈아 넣고 미래를 저당 잡힌 돈을 자신에게 쏟아붓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런 상황을 행복으로 받아들일 부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정말로 그 친구가 어머니의 행복을 바란다면, 조금은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스스로 행복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의 행복을 찾으려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볼 수 있도록 쫓기던 걸음을 잠시라도 멈추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당신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참을 수 없을 땐 잠시 벗어나 있어야 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면, 그렇다고 인정하고 해소할 방법을 강구하라."
-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p102.
죽어가는 사람을 가까이서 돌보는 이에게 주는 저자의 조언은 비단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몇 주 앞둔 순간에만 가치가 생기는 말은 아닐 것이다. 결국 삶은 죽어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삶의 모든 소중한 관계에 적용할 수 있는 조언이며, 결국 상대방에게 최선의 다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가치에만 매몰되어 버리면 안된다는 점에서 내가 그 친구에게 책을 빌어 꼭 전해주고 싶은 조언이기도 하다.

후회를 안고 일어설 수 있게 해 주는 것

후회를 안고 일어설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남겨진 소중한 사람들일 것이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너무나 후회스러운 와중에도 또 다른 후회를 쌓고 싶지 않다면 어느 순간에서는 억지로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냥 아프지 않은 순간이 없다. 그런 사람에게 이런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그녀는 이제 더 좋은 곳으로 갔어. 너도 그만 털고 일어나야지.'"
-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p270.
시쳇말로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다. 남에게 하면 끔찍한 폭력일 수 있는 이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는 말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해줄 수만 있다면, 엿 같지만 이 악물고 살아갈 힘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 날이 왔을 때 이 말을 나에게 해 주려면 내 인생에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을 최대한 만들어 놔야 할 것 같다. 지금의 나와 같은 경우라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의 행복이라는 가치가 나를 지탱해줄 것이다. 만약 아내와 아이가 없다면? 쉬운 길을 하나 잃은 셈이지만 그럼에도 나만의 가치를 찾아서 갈고 닦아서 광을 내 놔야 할 것이다.
만약 이마저도 못하고 떠나보낸 부모님이 내 인생의 유일한 가치라면? 결코 일어설 수 없겠지.

다시 후회를 줄이는 법으로 돌아가서, 남겨진 나에 대한 걱정 없이 부모님이 마음 편하게 떠나실 수 있으려면, 내가 더 이상 부모님에게만 기대지 않고 정말로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내가 단단하게 홀로 서지 못한 채 하는 효도는 소위 '모래로 쌓은 성'에 불과해서, 결국은 후회를 막아주지도 남은 후회를 안고 일어설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 호기심은 죽음이 임박하지 않은 여유로운 순간에 느끼는 호기심을 뿐이다."
-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p59.
그렇다. 아무리 고민하고 글을 가다듬어도, 내 글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부모님의 죽음도, 내 죽음도 가깝게 느껴본 적 없는 여유로운 상황에서의 호기심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사람이나 혹은 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죽어가는(삶의)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후회 없이 보내기 위해서는 후회가 남지 않을만큼 사랑해야 하고, 그렇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그 친구와 이 책의 덕이다. 내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한 번은 읽어봤으면 좋겠다.

몇 일에 걸쳐 겨우 겨우 짜낸 글을 마무리하는 오늘, 어머니로부터 받은 이 책에 대한 한 줄 평으로 이 책에 대한 평을 대신한다.
"젊은이든 늙은이든 인생을 진지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어 보는 게 좋겠다."
-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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