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
역사는 운의 연속이라고 누군가 그랬다던가.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우리 종의 역사가 물리학이나 생물학의 영역에서 분리된 '인지 혁명'부터가 어떠한 유전자 돌연변이라는 운에 의해 촉발되었다. 하긴, 우리 우주의 생성부터 태양과 지구의 형성, 생명의 탄생부터 진화까지 어느 하나 운의 영역 바깥에 있는 사건이라고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 즉 호모 사피엔스가 허구를 다룸으로써 대규모로 유연하게 협력하는 능력을 획득하여 지구의 정복자로 올라서는 정도의 사건 또한 운의 영역인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그렇다면 인구를 폭발시키고 잉여 생산물을 만들어냄으로써 문명의 발전을 촉발시킨 농업 혁명은 어떨까? 역시 기후에 맞게 우연히 발견한 몇몇 곡물류를 작물화시키고, 몇몇 적당한 동물들을 가축화시킬 수 있었던 운에 의해 발생했다. 농경을 위해 특정 지역에 정착하고, 모든 부와 기반 시설이 땅에 메임에 따라 수렵채집 시절의 유연한 주거 이동성을 잃어버린 우리는 땅따먹기, 즉 전쟁을 통해 경쟁하고 발전해왔다.
농업 혁명으로 영양의 편중이 심해지고 가축과의 집단 생활에 따른 질병의 교환이 발생하면서, 그리고 여기에 더해 가혹한 전쟁 상황이 더해지면서, 우리의 역사에서 소위 역병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고 이에 따라 우리의 역사를 바꾸는 주요한 운적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과 필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정확히는 그 전쟁 중 발생한 역병으로 쑥대밭이 된 그리스를 정복한 마케도니아를 계승했고, 페르시아를 시작으로 전설적인 정복 활동을 이어갔으나, 역병에 막혀 인도 원정을 이어나가지 못했으며 본인의 또한 질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었다.
- 로마는 그 주변을 둘러싼 습지에 퍼져 있던 역병에 의해 결정적인 침략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고, 유럽을 지배하는 제국이 되어 세계사에 거대한 영향을 주었으나 바로 그 질병으로 쇠퇴하고 몰락했다.
- 기독교는 박해받는 이단에서 로마의 쇠퇴기에 역병에 걸린 사람들을 구제함으로써 민심과 영향력을 얻었다. 기독교의 성지탈환이라는 미명 하에 진행된 대규모 상업적 원정인 십자군 전쟁은 레반트 지역에 들끓던 역병에 가로막혔다.
- 역사상 손꼽히는 거대 제국인 몽골 제국의 유럽 원정 또한 서유럽의 풍토성 역병에 의해 좌절되었으며, 이어진 중동 및 인도 원정 또한 역병에 가로막혔다. 다만 몽골군과 함께 전파된 선페스트는 유럽을 집어삼켰는데, 이로 인한 엄청난 인구 감소는 오히려 살아남은 유럽인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다.
-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전파된 역병은 기존의 인구를 말 그대로 쓸어버렸으며, 풍토성 역병으로 발전하여 유럽인 정착민들 또한 수 없이 죽였고, 그 노동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규모로 행해진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됐다.
- 아메리카 대륙에 전파되어 발전한 역병은 유럽 각국의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화 속도를 늦췄으며, 유럽 열강들 간의 식민지 쟁탈 전쟁에서 무수한 인명 피해를 야기하여 미국의 독립, 프랑스 대혁명 등 역사적 사건의 배경이 되었고, 미국을 비롯한 아메리카 식민 국가들이 유럽 제국들에 비해 현격한 군사력/경제력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쟁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이후에도 남북 전쟁이나 미국의 멕시코 침략, 1/2차 세계대전, 심지어 베트남 전쟁에서도 역병은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과학혁명의 시대에도 근절되지 않고 있다.
모기
티모시 와인가드, 2019, 모기, 커넥팅. |
'인류 역사를 결정지은 치명적인 살인자'라는 부제대로, 이 책은 모기와 모기매개 질병이 인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라는 관점에서 세계사를 설명한다. 얼룩날개 모기와 숲모기가 주로 매개하는 삼일열/열대열 말라리아, 황열병, 뎅기열 등의 모기매개 질병들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퍼져나갔으며 어떤 파괴력을 발휘했는지, 수많은 통계와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으므로, 말라리아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현대의 한국인으로서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말라리아에 대한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앞서 나열한 주요한 역사적 사건들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던 역병이라는 운적 요소에 항상 빠지지 않고 따라다닌 것이 모기와 모기가 매개하는 말라리아 등의 질병이다. 모기와 모기매개 질병의 파괴력은 너무나 강력해서 대부분의 기간에 인간이 쌓아온 경제력이나 군사력을 무력화시키기 충분했으므로, 자연스럽게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성사시키는 운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말라리아 매개 얼룩날개모기가 얼마나 큰 규모의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오늘날에도 말라리아의 공포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러므로 원인도 규명되지 않았고 치료법도 밝혀지지 않았던 지난날, 말라리아가 어떠한 존재였을지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 모기, p42.
"1492년 1억 명으로 추정되었던 서반구 토착 원주민들은 1700년 약 5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전세계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이 목숨을 잃은 셈이었다. ..중략.. 보수적으로 수치만 따져보자면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9,500만 명이 사망했다는 말이다. 이는 인류 역사상 기록된 단일 인구 재앙 중 가장 큰 규모로 거의 멸절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 모기, p 239.
"2000년 이후 매년 모기에 의해 발생하는 사망자 수는 평균 2백만 명을 웃돈다."이 책은 우리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하찮게 치부될 수 있는 모기가 사실을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려줌으로써 관점의 전환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하다. 이 책을 읽으면 또한 유럽과 미국의 역사를 어느 정도 개괄할 수 있고, 현대사회에서도 말라리아가 왜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다뤄지는지, 감염병의 전달과 예방이라는 메커니즘은 어떻게 동작하는지 맛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유용한 책이다.
- 모기, p5.
하지만 개인적으로 매우 인상적이었던 점은, 모기매개 질병이라는 운의 정확한 정체를 모르고 있던 시절에조차 이 운의 작용을 제어해낸 쪽이 대체로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운적인 요소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맥락적으로 접근하여, 시스템적으로 모기매개 질병이라는 부정적인 운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있다면) 긍정적인 운의 영향을 최대화할 수 있었던 인물 혹은 집단이 더 나은 성과를 가져갔다.
우리가 실력을 키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운을 운으로 인지하는 것을 넘어 운이 아니게 만드는 영역까지도 경우에 따라서는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의 역사와 모기가 알려주는 것이다.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들
유발 하라리, 2015, 사피엔스, 김영사 |
홍춘욱, 2019,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로크미디어. |
율라 비스, 2016, 면역에 관하여, 열린책들. |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