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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하느님께서 맺어 놓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 마르코 복음, 10장 9절.
나는 가톨릭 신자로서 아주 독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결혼과 가정에 대한 관점만큼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아주 많은 영향을 받았다.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내 삶에서 매우 중요한 목표 중 하나이고, 실제로 사랑하는 아내와 5살 된 아이는 나에게 큰 행복일 뿐만 아니라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동기의 원천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는 내가 연휴 첫날 아침부터 책 읽고 서평 쓰러 나오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기독교의 가르침은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조던 피터슨이 <인생의 12가지 법칙>에서 주장한대로 하느님의 일견 변덕스러운 의지에는 일희일비하지 말고 그저 최선을 다해서 살라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교리라면, 결혼 생활이 어렵더라도 어떻게든 배우자를 더 사랑함으로써 극복해야지 갈라서는 것을 선택하지 말라는 것이니 맥이 통하는 가르침이긴 하다. 현실은 가르침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일단은 이혼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이 얘긴 접어두기로 하자.
 정말 문제는 따로 있다. 하느님이 맺어 놓으신 것을 하느님은 갈라 놓으실 수도 있다는 것.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죽음을 통해서일 것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 서로 사랑하고 아끼더라도 나와 아내 중 누군가는 먼저 하느님 곁으로 갈 것이다. 그러면 남은 사람은 재혼을 실행에 옮기기 전까지는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 재혼의 가능성을 무시한다면 요즘 같이 기대 수명이 긴 시대에는 일찍 사별해서 오래 혼자 살거나, 노년에 혼자 살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미혼, 비혼, 이혼, 사별

연도별 혼인건수 및 조혼인율(인구 1천명 당 혼인 건수) 추이. 직전 40년간 조혼인율이 지속적으로 감소 추세인 것을 볼 수 있다. 통계청 제공 <2018년 혼인 이혼 통계>에서 발췌.

연도별 남녀 평균 초혼/재혼연령추이. 지난 20년간 거의 선형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통계청 제공 <2018년 혼인 이혼 통계>에서 발췌.

이미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있는 나와 아내는 사별이 가장 높은 확률로 맞이할 독신의 형태지만, 내 아이는 어떨까? 2018년 통계청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평균 초혼 연령을 보면 남녀 모두 30세가 넘는다. 지난 20년간 과장 조금 보태 선형적으로 증가해온 것을 토대로 아이가 33세가 되는 2048년을 단순하게 예상해보면? 남자 39.8세, 여자 37.0세다. 아직도 평균 초혼연령에 도달하지 못했다. 무슨 얘기냐면, 내 아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20년 가까이 미혼 상태로 지낼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나마도 결혼을 하겠다고 생각했을 때 얘기다.
"미국은 1950년만 해도 성인의 22%가 독신이었지만, 오늘날은 50% 이상으로 훌쩍 치솟았고, 현재 태어나는 4명의 아기 중 1명은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라 예측된다."
- 혼자 살아도 괜찮아, p28.
30년 뒤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미국과 우리 나라는 사정이 다르겠지만, 내 아이는 약 25%의 확률로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을 -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 가능성이 있다. 그래도 내 아이인데 결혼을 못 할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 슬프니까, 안 할 가능성으로만 생각하기로 하자. 어찌됐든 내 아이가 비혼을 선택할 가능성도 상당하다는 뜻이다.

연도별 이혼건수 및 조이혼율(인구 1천명 당 이혼 건수) 추이. 대략 혼인건수 및 조혼인율과 비교하면 이혼 확률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통계청 제공 <2018년 혼인 이혼 통계>에서 발췌.

이혼은 어떨까? 내 아이가 성년 후 20년의 미혼 기간을 거쳐 40세에 결혼했다고 했을 때 이혼이라는 이벤트를 겪지 않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시간차가 있어 정당한 비교는 아니겠지만 2018년 기준으로 인구 1천명 당 혼인 건수 대비 이혼 건수를 비교해보면 약 40% 수준이다. 이걸 이혼 확률이라고 생각하면 결혼을 하더라도 제법 높은 확률로 이혼에 의한 독신 생활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통계 자료를 보면 2018년 현재 이혼자 평균 연령은 50세가 조금 안 되는 수준인데, 1998년부터의 증가 추이가 그대로 유지된다고 가정하면 2048년 기준으로는 60세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내 아이가 40% 확률로 경험할 이혼이 이 시기에 일어난다고 가정하면, 이 때부터 다시 2~30년을 독신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독신은 남의 얘기가 아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내가 이미 결혼을 했고, 바람대로 순탄한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독신 - 혼자 산다는 것 - 은 어느 누구의 문제도 아닌 나와 내 가족의 문제이다. 나 혹은 아내는 최선의 경우에도 배우자 없이 상당 기간을 독신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내 아이는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살겠지만, 결혼 전까지 긴 - 예상에는 20년! - 미혼 시기를 독신으로 보낼 것이고, 상당한 확률로 - 약 25% - 결혼을 선택하지 않아 평생을 독신으로 살 것이고, 결혼을 하더라도 상당한 확률로 - 약 40% - 이혼하여 여생을 독신으로 살 것이고, 이 모든 것을 겪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50%의 확률로 배우자와 사별하여 - 배우자가 먼저 죽는다면 - 여생을 독신으로 살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독신은 남의 일이 아니다. 나와 내 사랑하는 가족이 언젠가는 아주 높은 확률로 겪게 될 내 일인 것이다.
 우리는 기대 여명의 증가로 노후의 빈곤을 걱정하며 은퇴 이후를 대비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독신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또한 미리 준비해둬야 하지 않을까?

엘리야킴 키슬레브, 2020, 혼자 살아도 괜찮아, 비잉.

이 책은 독신의 삶과 행복을 사회과학적으로 풀어낸 책으로, 개인의 주관이나 선호와 무관하게 독신자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고, 어떤 전략을 통해 행복감을 증진시킬 수 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책에 따르면, 독신 가구의 증가는 세계적인 추세며 선진국에서 두드러지긴 하지만 가장 보수적인 나라인 중동 국가에서조차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결혼과 결혼을 통해 정의되는 가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던 지위가 점차 약화되는 데는 다양한 원인이 있는데, 이 원인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대체로 그 영향을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독신 가구의 증가 추세가 반전될 가능성은 요원해보인다. 즉,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독신으로서의 삶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또한, 인생의 어느 시점까지는 기혼자들의 행복도가 미혼자 대비 높게 유지되는 면이 있지만, 애초에 행복한 사람들이 더 쉽게 결혼을 선택한다는 선택효과를 고려하면 결혼 그 자체가 사람의 행복도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크지는 않다. 또한 노년에 이혼이나 사별의 비율이 증가함에 따라 기혼자 - 정확하게는 결혼 유경험 그룹 - 의 평균적인 행복도는 떨어지는데, 애초에 독신이었던 사람들에 비해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동안 노년에 필요한 인적 네트워크를 충분히 다지지 못하는 것이 한 가지 원인이다.
 독신자들은 성 소수자들이나 소수 인종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차별과 압력을 경험하는데, 주로 나이에 따라 결혼한 상태를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 반대 급부로 독신으로 사는 것을 문제가 있는 것으로 취급하는 형태, 혹은 직장에서 독신자들에게 더 많은 희생을 대가 없이 요구하는 것 등으로 나타난다. 독신자들은 1) 차별 자체에 대한 인식, 2) 자신에 대한 긍정적 인식 구축, 3) 우호적 환경 찾기, 4) 차별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 5) 자기효능감 높이기 등을 통해 차별과 압력에 대항하고 행복감을 높일 수 있다.
 독신자들은 기혼자들 대비 사회적 자산의 형성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함으로써 현재의 외로움과 미래의 외로움을 모두 줄일 수 있다. 또한 외로움이라는 감정과 고독이라는 상황을 분리하는 연습의 기회를 더 가짐으로써 혼자라는 상황에 더 잘 대응할 수 있다. 반면 기혼자들은 결혼의 배타적인 특성 상 사회적 자산의 형성에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입하기 어려우며 혼자만의 시간에 익숙해질 기회를 갖기 어려우므로, 결혼 관계가 더 이상 원만하지 않거나 이혼 혹은 사별에 의해 갑자기 독신으로 살아가게 됐을 때 적응에 어려움을 겪기 쉽다. 또한 독신자들은 탈물질주의 가치관을 통해 기혼자들보다 더 많은 행복감을 얻을 수 있는데, 전통적인 가족 중심의 책임을 요구받지 않는 만큼 더 쉽게 탈물질주의 가치관을 실행에 옮기고 그로부터 다시 해당 가치관을 강화시킬 수 있다.

독신자들이 사회의 차별과 압력을 극복하는 전략, 사회적인 자산을 적극적으로 축적하는 태도, 탈물질주의 가치관의 강화 전략 등은 기혼자들에 비해 오히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효과적인 것으로 보이며, 특히 개인적 네트워크 형성을 용이하게 하는 현대의 기술 발전에 의해 더 강화되고, 심지어 갈수록 독신 인구가 증가하는 이유인 것으로도 보인다. 독신 인구는 갈수록 사회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므로, 사회의 차별이나 압력도 점차 줄어들 것이다. 개인적 네트워크 또한 기술의 발전에 따라 더 쉽고 넓고 강하게 형성될 것이므로 독신자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는 점차 더 용이해질 것이다.
 그러면 이미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 사람들은 어떻게 행복을 추구해야 될까? 나는?

기혼자들은?

독신들이 사회적 차별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요소들은 독신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 사회적으로 독신자들 대비 겪고 있는 차별 등의 불이익은 없다고 볼 수 있으므로, 차별을 인식하거나, 차별에 저항하거나, 차별이 적은 환경을 찾아가는 등의 노력은 추가로 들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독신자들이 차별을 이겨내기 위해 가져가는 이러한 전략들 이면에 있는 기본적인 태도 - 주변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나의 가치를 주장하는 - 는 기혼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긍정적인 자기 인식이나 자기효능감 제고와 같은 전략도 마찬가지여서, 이러한 요소들을 더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우리는 '자기계발'이라고 부른다. 즉, 더 똑똑해지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독신자든 기혼자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전제조건인 것이다.
 사회적 자산의 형성이나 탈물질주의 가치관의 실천 관점에서 기혼자들이 독신자들보다 제약이 많은 것은 내 경험으로 봐도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개인의 영역에서 이는 노력 여하에 달린 문제일 수 있으며, 사회적 자산의 형성이나 자아실현 욕구의 추구를 위해 투입할 수 있는 자원의 양을 늘리는 노력과, 투입 가능한 자원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가족, 특히 배우자와의 합의와 효과성, 즉 실력의 영역이다. 즉,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로 더 효과적으로 가족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하고, 더 효과적으로 교류할 수 있어야 하며, 이 모든 것을 위해 더 효과적으로 스스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내 결론은 명확하다. 기혼자들은 독신자들보다 인생의 많은 영역에서 더 효과적인 사람이 됨으로써 행복감을 높일 수 있다. 이 표현은 '할 수 있다'보다는 '해야 한다'에 더 가깝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서두에도 언급한 것처럼, 가족의 존재는 더 열심히 살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행복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는 독신자들이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가족 - 진정한 친구 - 을 이미 가진 셈이기 때문에 명백하게 기혼자들이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우는 소리 하지 말고 더 열심히 살자.
 나도 음력 설을 하루 앞둔 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새해에는 더 많은 복을 내 손으로 만들어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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