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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스러운 노년을 위해 필요한 것들


"그런 노년을 나는 바라 마지 않는다."
- 나이듦에 관하여, p160.
보통은 부정하기 바쁜 노년이라는 것을 '바라 마지 않는다'니, 어떤 노년일까?


"바라건데 운이 따라서 노년기의 대부분 동안 그래 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더라도 초반에는, 높은 자존감과 주체성 같은 중년의 장점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공명심으로 착각하기 일쑤였던 허영심이 잦아들고, 마음이 관대해지고 남을 돌아볼 줄 알게 되며, 내가 내린 결정을 끝까지 밀고 나갈 추진력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인생 목표를 추구하는 여유와 깊이가 다른 삶의 만족감을 맛본다."
- 나이듦에 관하여, p159.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매력적이다. 아내와 곱게 그리고 사이 좋게 늙어가자는 얘기를 할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노년의 내가 이런 요소들을 갖추고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자존감과 주체성, 관대함과 배려, 추진력이라니, 이런 것들이 과연 노년에도 붙들고 있을 수 있는 요소이긴 한 건가? 거기다 새로운 인생 목표라니, 이거야말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다.

아내와 내가 원하는 '함께 곱게 늙기'는 대충 이런 모습인 것 같다. 여기까지는 어떻게든 될 것 같지만 그 다음은 어떨지..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gb-photostream/16429274630)


내가 대충 70대의 고령이 되어 명실상부한 노인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자존감과 주체성은 신체적인 건강과 재정적인 여유를 통해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운이 좋아 건강과 경제력이 잘 유지된다면, 사회가 유지되는 이상 약해진 신체 능력을 돈으로 보완하면서 여전히 많은 일들을 스스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관대함과 배려는 평생에 걸쳐 함양해나가야 하는 소양인 것 같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기본적으로 여유가 뒷받침되어야겠지만 여유 있다고 인심 좋다는 법은 없으니 이 부분은 내가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지금의 나, 그리고 중년의 내가 노력하고 준비하는 데 따라 기대를 걸어봐도 좋을 것 같다.
 추진력은 조금 어려운데, 어떤 결정을 이미 내린 상태라면 앞선 요소들이 갖춰진 상태에서 이를 밀고 나가는 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 자존하고 주체적인 누군가가 관대함과 배려를 갖춘 상태에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은 저항 자체도 많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그 결정은 어디서부터 나와야 할까? '잘 정립된 인생관'이라는 답이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데, 이 인생관이라는 개념이 참 고약한 게, 나는 여전히 내 인생관을 정립하지 못했고 당연히 노년의 내가 가질 인생관이 어떠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까지 의료를 개입시킬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예상이 안 된다. 실제로 한 조사에 의하면 건강할 때 생각과 아플 때 생각이 다른 건 보편적인 특성인 것 같다. 나라고 특별하게 지금의 가치관을 평생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인생관을 잘 살피고 가다듬어가다보면 소위 '잘 정립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관점을 갖고 흔들리지 않는 결정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런데 실제로 절망적인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죽어 가는 환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다른 얘기를 했다. 단 며칠만이라도 더 살 수 있다면 병원이 권하는 건 뭐든지 하겠다는 것이다."
- 나이듦에 관하여, p733.

추진력보다 내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건 '새로운 인생 목표'라는 놈이다. 아무리 자존감과 주체성, 추진력이 있더라도 추구할 목표가 없다면 다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인생관'과 마찬가지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한창 때 추구할 목표도 시원하게 찾지 못했는데, 그 다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사실 지금의 내 수준이라는 게, '떳떳함'이라는 가치에 목표를 두고 회사에서, 집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이 '떳떳함'이라는 가치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시선에 대한 내 판단을 담고 있기 때문에, 언제 '뻔뻔함'으로 이어질 지 모르는 가치라는 점에서 특히 체력적으로 약해지는 노년의 인생관으로 삼기에는 불안한 감이 있다. 조금 더 구체적이고 고정적인 목표를 찾고, 이를 추구해가는 과정에서 바쁘고 여유 없는 중년에는 미뤄둔 것들이 노년에 추구할 목표가 되면 가장 자연스럽지 않을까.
 내 늙어감의 과정이 이와 같을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흐름이 될지 지금은 알아낼 방법이 없다. 하지만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상황보다는 한 단계 나아졌다고 봐야 할 것 같고, 이제부터는 노년의 내가 추구해야 할 목표들을 찾고 정리해두는 게 또 하나의 목표가 될 것 같다.

나이듦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거의 모든 것

루이즈 애런슨, 2020, "나이듦에 관하여", 비잉.

이 책은 글빨 넘치는 노인의학 전문의가 나이듦과 노년, 그리고 노인들에 대한 의료계와 사회의 편견과 차별에 대해 쓴 책이다.
 '노인의학'이라니, 이런 분야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저자는 소아과가 필요한 이유와 동일한 이유에서 노인의학과가 필요하며, 의료의 대상이 되는 인구 집단의 개인적 다양성을 생각하면 최대 두어 세대의 인구집단을 다루는 노인의학과가 더 세분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구구절절 맞는 말인 것 같은데, 왜 지금까지는 이런 생각을 한 번도 못해봤는지, 자괴감 들고 괴로운 와중에 책은 어떻게 사회가 온통 노년을 부정하고 회피하려고만 했는지도 다룬다.
 글솜씨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의대 졸업 후 문예창작으로 예술학 석사를 취득한데다, 미국 내 출판된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푸시카트 (문학)상'의 최종 후보에 네 차례 오른 - 많은 작품활동을 했고 문학적 수준이 높다는 뜻으로 이해하자 - 이력이 있는 저자는 8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시종일관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물론 페이지 수 자체의 압박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노인의학이라는 분야에 대해 처음 알았고, 이제 곧 젊은 노인을 졸업할 부모님과 중년-젊은 노인의 중간쯤 어딘가에 계시는 것 같은 장인, 장모를 떠올렸고, 네 분의 노년이 어떠할지 상상했으며, 위에 언급한대로 내와 아내는 어떻게 늙어가면 좋을지 걱정했다. 책에서 얘기하는 의료제도와 사회의 편견은 개인의 영역에서, 특히 노령 환자와 그 가족된 입장에서 극복 가능한 영역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책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노인 환자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로부터 나와 내 부모의 노년기는 어떠했으면 좋겠는지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막연한 바람을 점차 구체화시켜 마침내 현실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또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책에서 저자도 얘기하듯이 행복한 노년이라는 목표는 스스로 노력해서 만들어갈 - 운이 따라줘야 하겠지만 - 수 있을 것이고, 이 책은 노인의 몸과 노년의 삶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목표를 더 선명하게 만드는데 크게 도움을 줄 것이다.
"변화는 스스로 이뤄 내는 것이다. 여러 가지 시나리오 중에서 축복받는 노년기를 목표로 정해 신념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그것이 현실이 되게 할 수 있다."
- 나이듦에 관하여, p509.

당장 이 책을 두 권 사서 양가 부모님께 배송시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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