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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독서를 위해 필요한 것들

왜 몰입이 안될까?

이상한 기분이다. 분명히 얇고 쉽게 읽히고 재미도 있는 책인데, 정작 나는 책의 내용에 빠져들지는 못하고 있는 것은.

책의 내용은 이렇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밤하늘을 보면서 만들어낸 48개의 옛 별자리들이 있다. 이 별자리들은 최고신 제우스가 훌륭한 업적을 남긴 동물이나 인간을 기리거나, 한 때 훌륭했으나 스스로의 오만함에 발목 잡힌 자를 통해 인간들에게 경고를 남기기 위해 하늘에 새겨졌다. 그래서 각 별자리들은 신화 시대의 신들이나 인간들, 동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그 이야기들로부터 헌신의 가치, 오만의 위험 등의 교훈을 후대에 알려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과학적인 탐구를 통해 세상을 더 정확하게 알아내는 중에도 이 별자리들이 갖고 있는 이야기들에 공감하고 기존의 별자리들을 보존하려 한 반면, 현대의 과학은 더 넓고 깊어진 관찰 능력을 통해 우주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되면서 이런 이야기들의 가치를 무시하게 된 결과로, 별자리들을 무의미하고 추상적인 기호로 만들어버렸다.

데이비드 W. 마셜, 2020, "하늘에 그려진 이야기", 커넥팅.

이 책은 저자가 고대의 별자리와 그 별자리에 담긴 이야기, 교훈 등을 보존하고자 하는 마음에 쓴 책이다. 앞서 언급한 그리스 신화들과, 그로부터 생겨난 별자리들을 소개하고 있고, 하늘에서 이 별자리들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별자리들을 어떻게 생활에 활용했는지 함께 소개하고 있다.
 얇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며, 밤하늘과 천문에 흥미가 있거나, 그리스 신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제법 재미있기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에 해당한다면 더 좋지 않을까.

배경지식, 그리고 흥미

돌이켜보면 아마도 아직 국민학생이던 시절 - 난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세대다 - 가장 재미있게, 즉 여러 차례 읽었던 책 중 하나가 <호메로스 이야기>, 그러니까 아마도 <일리아스>였다. 그게 벌써 근 30년 전이라 정확한 기억이라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인간 영웅들의 업적에 설렜고, 신들의 변덕에 혼란스러웠고, 신화 속의 괴물들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별자리에 담겨진 이야기들이 예전의 기억에서 새록새록 떠오르며 조금은 추억에 잠길 수 있었다.
 나는 천문학에도 흥미는 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나, 스티븐 호킹의 <호두껍질 속의 우주> 같은 책들을 읽으며, 인류가 우주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에 흥미를 느꼈고, 우주의 크기에 압도됐다. 지구의 소중함, 인류라는 존재, 나라는 한 개체의 미약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고, 밤이 되면 으레 하늘을 쳐다보면서 익숙한 별들을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내 흥미라는 것은 딱 여기까지였다. 한 학기에 세 번, 네 번씩 시험을 보는 과목이 천지인 공대생으로서 나는 전략적인 포기라는 개념을 밑바탕에 깔고 사고하는 데 익숙해졌다. 이후 20년에 걸쳐 오락실, 노래방, 볼링장, 만화방, 피씨방, 플스방, 당구장, 술집을 찾는 빈도는 꾸준히 줄었다. 시험을 준비하려면, 과제를 하려면, 논문을 쓰려면, 일을 하려면, 가족과의 충실한 시간을 보내려면, 이를 지속 가능하게 하려면, 그저 단기적인 즐거움을 위한 취미들은 시간과 생산성이라는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사치일 뿐이었다.
 같은 관점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별자리를 찾아보기 위해 추가적인 공부를 하거나, 딱히 새로운 교훈을 얻을 수도 없을 것 같은 -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다 - 그리스-로마 신화를 다시 읽는 것도, 그저 소모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또 아주 생산적이지는 않은 취미일 뿐이었다.

흥미와 지식은 상호 보완적이라고 생각한다. 최초에는 흥미가 있어야 지식을 구하지만, 지식이 있어야 더 깊은 흥미를 느끼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봤을 때, 나는 이 두 분야에 대해서는 단 한 번의 사이클도 제대로 거친 적이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말로는 흥미가 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머리로는 재밌는 책이라고 판단하지만 마음은 다른 판단을 하고 있으니 책에 몰입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좋은 책이다.
 나와 같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누군가는 이 책을 계기로 다시 그리스 신화나 밤하늘을 다시 한 번 쳐다보게 될 것이고, 이들에 대한 흥미를 계속 발전시켜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는 어느 한 쪽에 대한 깊은 흥미를 갖고 있어서 다른 한 쪽에 대한 새로운 흥미를 느끼고 즐거움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 아이도 자라면서 언젠가 그리스 신화를 접할 것이고, 밤하늘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 때는 나에게도 그리스 신화와 밤하늘의 별자리 모두 지금과는 다른 의미로 흥미로운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멀지 않은 미래의 내가 책장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이 책은 또 다른 의미로 나에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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