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평범하게 행복하기'가 사실은 쉽지 않은 이유

내 생각에 행복이란.. (출처: Pixabay)


주언규, 신영준, "인생은 실전이다", 상상스퀘어, 2021.


<인생은 실전이다>를 읽고, 참 좋은 책이긴 한데 80편짜리 에세이 모음집이다보니 나는 뭘 갖고 글을 써보나 고민을 하다가, '평범한 행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나는대로 써 보기로 했다.


아마도 취업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XX 지원자께서는 꿈이 무엇인가요?"라는 취지의 질문을 받아봤을 것이다(이것도 트렌드를 따라서 요즘에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런 질문을 처음 받으면, 혹은 받을 거라고 처음 알면,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당황하거나 속으로는 살짝 짜증이 나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받으면 신이 나서 자신의 꿈 얘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는 걸 당연히 가져야 한다고 요구받을 때, 마치 꾼 적도 없는 돈 갚으라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될 테니까.

이런 질문이라는 건 마치 '누구나 크고 가슴뛰는 꿈을 하나 둘 정도는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 아냐?'라는 태도의 발현인데, 정작 그 질문을 하는 면접관 본인은 이런 꿈이 있는지 되묻고 싶어진다. 게다가 사실 회사라는 게 직원 꿈 이뤄주자고 존재하는 곳도 아닌데 구인의 과정에 이 질문이 왜 필요한 것인가.

내 경험을 돌이켜보자면, '훌륭한 아버지이자 좋은 남편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대답했다가, '이 회사 다니면서 쉽지 않으실텐데..'로 시작하는 약간의 비웃음 섞인 반응을 샀던 것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개인이 성취하고자 하는 도전적인 목표라는 점에서는 내 꿈은 동일하다. 다만 이건 '꿈'이라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에는 너무 개인적인 꿈이고, 솔직히 꿈이라기에는 조금 막연한 것도 사실이라 내세우는 꿈은 '없는' 상태로 찾고 있는 것일 뿐.

사실 개인의 꿈이 꼭 다른 사람 영감 주라고 가져야 하는 것이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전혀 아니다'이다. 이런 것은 조직의 리더가 만들고 보여줘야 할 '비전'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이런 면에서 당시 내 면접관이었던 임원들 본인은 어떤 꿈과 비전을 갖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조직원들을 고무시켰을지 궁금한 마음도 있지만, 이제와서 딱히 중요한 얘기는 아니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는 평범한 행복에 대한 꿈, 이를테면 '훌륭한 아버지이자 좋은 남편이 되는 것', '하루하루 욕심부리지 않고 만족하는 삶', '평범한 행복' 등 누군가 질문하면 마지못해 짜내는 꿈들은 일견 평범하다. 그런데, 이게 정말 '평범'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쉬운' 걸까?

여기에 자신 있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평범한 사람이 아닐 거다. 아마도 수신(修身)제가(制家)는 이미 했고 이제 나라를 다스리거나 천하를 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리고 책에 아주 잘 정리되어 있기에, 평범한 행복이라는 게 평이하게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닌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평범함'이라는 가치는 모호하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변화하며 자원을 집중하기 어렵다.
  2. 평범한 건강, 평범한 자산, 평범한 벌이, 평범한 평판, 평범한 배우자, 평범한 자녀 등등.. 평범한 조건이 많아질수록 그 모두가 달성될 가능성은 0으로 수렴한다.
  3. 그 자체로 복잡계인 세상이 주는 보상은 구조적으로 상당한 노력에 적당한 보상을 주지, 적당한 노력에 적당한 보상을 주도록 되어 있지 않다.


Pareto Distribution (출처: Wikipedia)

1번은 '목표는 명확하며 측정 가능해야 달성 가능성이 높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면 이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뭐가 '평범'한 것이고, 어떤 조건이 만족되면 내가 '행복'하게 느끼는지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면 그걸 추구하기 위해 가용한 자원을 집중하고 부차적인 것들을 포기할 수 있을 테지만, 반대로 옆을 돌아볼 때마다 좋아 보이는 게 계속 바뀐다든지, 내가 무엇에 행복한지를 모른다면, 상황이 흘러가는대로 살다가 문득 이게 아니라는 생각에 고통스러워질 뿐이다.

2번은 확률이론과 확률프로세스를 배운 정통 공돌이로서 얘기하자면, 평범의 상징과도 같은 가우시안 랜덤 변수 여러 개를 곱하면 이 합성된 변수의 분포는 더 이상 가우시안 분포가 아니라는 말이다. '평범한 XX'의 조건이 많아질수록, 하나라도 평범하지 않을 가능성 – 다른 말로 불행할 위험 – 이 커지는 것이고, 이것을 시간축에서 미래로 계속해서 확장시키면, 음.. 한숨이 나오는 개념이 되는 것이다. 지금 평범하기도 쉽지 않은데, 내일 평범하고, 모레도 평범하고, 평생 평범하게 행복하하다는 흔치 않은 상태를 유지시키는 것은 확률적으로 굉장히 어렵다는 것.

3번은 2번과 연결된 것인데, 나심 탈레브의 블랙 스완이라는 유명한 개념의 밑바닥에 있는 파레토 법칙 혹은 멱분포(파레토 분포)다. 공저자인 신영준 박사가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이기도 하고, 나 또한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라는 복잡계를 지배하는 분포는 정규분포가 아니라 이 멱분포이고, 네트워크에서 노드와 연결의 수, 학계에서 논문과 인용의 수, 백화점에서 고객과 매출량, 경제에서 개인과 부의 관계는 모두 이 분포를 따른다고 한다. 내 생각에도 중요한 얘기냐면, 중간값과 평균값이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평범함'에 대한 우리의 기준치는 평균값에 맞춰져 있는 반면, 이 평범함을 달성하기 위해 보통의 사람들이 투입하는 '적당한' 노력과 성과는 중간값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쉽게 정리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한 삶은 '적당한 노력'으로 '적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지만, 현실은 불확실성 때문에 적당한 노력이 아니라 '충분한' 노력으로 '적당한 보상'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간극만큼 평범한 삶은 현실에서 말어지게 된다.

- 인생은 실전이다, p30.

우리는 '평범'을 얘기할 때, 으레 적당한 노력과 평범한 보상을 떠올리지만 평범한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데, 여기에 던바의 법칙 - 한 명이 실질적으로 맺고 유지할 수 있는 관계의 수에는 제한이 존재한다는 - 과 가용성 편향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내가 생각하는 '평범함'의 기준이 되는 비교집단에 따라 보상과 노력의 기준이 모두 맞춰진다면 큰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성취를 이뤄낸 사람들이 얻는 보상만 뉴스에서 보지, 그들이 투입한 노력은 접하지 못한다. 이렇게 '평범한' 보상에 대한 기대치는 이렇게 미디어에 끌려올라가고, '적당한' 노력에 대한 기준은 내 준거집단에 고정되면, 평범함은 안드로메다로 멀어지는 게 아닐까.

이게 우리가 명확하고 측정 가능하며 내 가치관에 정합되어 있어 기준점이 나 자신인 '꿈'을 찾고 좇기 위해 힘써 노력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하고, 이런 생각을 강화하고 정리할 기회로 삼기에 <인생은 실전이다>는 탁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외국보다 한국 초코파이가 초코 함량이 더 높은 이유

여느 몹쓸 공돌이 개그  언젠가 돌아다니던 초코파이 초코 함량 계산식. 답은? 무려 약 31.8%다. 이 정도면 빈츠보다도 높은 함량일지도.. 자고로 무릇 공대생 혹은 공돌이라 하면 '일반인' - 여기서는 비 공대인 -이라면 알 필요도 없는 기호로 범벅이 된 수식을 붙들고 밤을 샌다든지, 거기서부터 파생된 온갖 과제를 하느라 밤을 샌다든지,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들끼리' 머리를 싸메고 수시로 밤을 새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밤을 샌다는 건 낮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고 곧 '일반인'들과의 소통의 기회가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다보면 시나브로 쌓이는 전공 지식과 함께 '바깥 세상'에 대한 환상 그리고 '일반인'들과의 유머적 단절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씩 키우게 되는데, 이런 것들을 비틀어 탄생한 것이 공대 개그 혹은 공돌이 개그이다. 예를 들어 '외국보다 한국의 초코파이가 초코 함량이 더 높은 이유'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면 당신도 훌륭한 공돌이일 가능성이 높은데(힌트는 위 수식을 영어로 바꿔보라는 것이고, 답은 마지막에..), 무릇 공돌이라 하면 이렇게 공돌이를 위한 개그를 이해하고 웃을 수 있는 소양을 갖추게 되고, 일반인들은 해설이 있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개그까지도 즐기면서 모종의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에, 다시 일반인들과의 유머적 단절은 더 공고해진다. 이런 거에 웃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다. - 출처: 나무위키 ' 공대개그 ' 페이지. 나 또한 정통한 공돌이로서 - 입사 전까지 같은 건물에 10년을 들락거렸다! - 유사한 과정을 거쳤고, 일요일 밤을 지배하던 주류 개그는 1도 모르지만 각종 공돌이 개그에는 피식거리는 단계에 도달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이런 상황에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질량이 없는 물질'만 만날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 날로 있는

차멀미가 날 때는 앞을 봐야 한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가족 여행을 가면 나는 꼭 어디에 도착해서야 잠에서 깨곤 했다. 그 때마다 조수석의 어머니께서는 좋은 경치는 하나도 못 보고 밥 먹을 때만 일어난다고 핀잔을 주곤 하셨는데, 아무리 깨어 있으려고 해도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난 여지 없이 곯아떨어졌다. 성인이 된 후에 생각해보니 그 시절의 나는 차멀미를 했던 것이었다. 멀미라는 건 눈과 귀 - 정확히는 전정기관 - 에서 감지되는 움직임에 대한 정보 불일치를 뇌가 불편하게 느끼는 현상이라고 이해하면 얼추 맞을텐데, 차에서 스마트폰을 볼 때 속이 더 메슥거리거나, 운전자는 멀미를 하지 않는 걸 생각해보면 된다. 차멀미를 할 때는 먼 산을 보라거나,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마시라거나 하는 민간요법이 전해지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다 소용 없는 일이다. 달리는 차 창문을 열고 머리 날리게 바람을 맞으면서 볼 것도 없는 먼 산을 아무리 노려보고 있어도, 멀미는 잦아들지 않았다. 조수석에라도 앉을 수 있다면 좀 나았겠지만 조수석에 갈 짬은 전혀 아니었으니 가장 확실히 멀미를 피하는 방법은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는데, 이걸 어느 정도 인지한 다음에는 메슥거림이 느껴질 때는 일부러 눈을 감고 잠드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아마 이 기전이 몸에 쌓이면서 차만 타면 자는 식으로 몸이 반응한 게 아닐까.  ""과학의 속도가 윤리적인 이해 수준을 넘어서면, 사람들은 각자가 느끼는 불편함을 표현하느라 애를 먹게 된다." 2004년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쓴 글이다." - 유전자 임팩트, p620. 어른이 되면서 멀미 자체에 대한 민감도도 떨어진데다 이제는 어디 갈 때 거의 운전석에 앉기 때문에 멀미에 시달릴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급변하는 세상과 기술의 발전을 보고 있으면 가끔 속이 울렁거릴 때가 있는데, 이럴 때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케빈 데이비스, " 유전자 임팩트 &qu

호르몬 불균형과 지방, 그리고 치즈

 호르몬 불균형은 건강에 좋지 않다.  주로 호르몬이 부족하니 뭔가로 보충해야 한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 같긴 하지만, 이 주장에 동의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뭐든 균형 잡힌 게 좋은 법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부족하니 보충해야 한다는 말은 많은데 너무 넘치니 줄여야 한다는 말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글에 '에스트로겐'과 '식품'을 한글과 영문으로 검색해보면, 어느 쪽이든 건강과 미용에 좋은 에스트로겐이 부족한 갱년기에 이것이 풍부한 음식을 먹으라는 소개 페이지만 잔뜩 검색된다. 물론 여기에 소개되는 음식은 거의 '식물성' 에스트로겐을 함유한 호박, 쥐눈이콩, 석류 같은 것들이긴 하지만, 아무튼 과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페이지는 보이지 않는다. 닐 바너드, "건강 불균형 바로잡기", 브론스테인, 2021. 닐 바너드의 <건강 불균형 바로잡기>는 에스트로겐을 비롯한 호르몬의 불균형, 그 중에서도 주로 과다한 호르몬이 어떤 건강 문제들을 일으키는지, 그리고 호르몬 과다를 일으키는 원인과 이를 바로잡기 위한 식습관을 알려주는 책이다. 호르몬 불균형이 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과 식습관 개선을 통해 극적으로 개선된 사례들, 그리고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의학적 연구 결과들을 다양하게 알려준다. 물론 우리가 <영양의 비밀>을 통해 이미 알고 있듯이 우리 몸이 어떤 영양소에 반응하는 정도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여기 소개된 극적인 사례들이 당장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호르몬과 건강에 대해 현대 과학이 밝혀낸 가장 신뢰성 높은 지식을 바탕으로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식습관을 만들어가는 것은 '행복에 있어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안티프래질한 전략일 것이다. "밝혀진 바로 유방암의 최대 위험인자는 호르몬, 그 중에서도 에스트로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