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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을 쥐어짜는 힘

'마른 걸레 쥐어짜듯 비전이라는 걸 쥐어짜내야겠다.'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프라나브 미스트리. 이 아저씨랑 일해볼 뻔 했더랬다.. (출처: 위키피디아)

지금의 조직에 강한 문제의식만 느끼던 시절에, 결국 남게 되더라도 이직이 허황된 꿈인지 선택 가능한 옵션인지 가늠해보겠다고 결심한 어느 해의 일이었다. 어쩌다보니 TED에서나 보던 창의력 넘칠 것 같은 아저씨가 이끄는 팀에 참여할 기회가 있어 덜컥 지원을 했는데, 무려 본인과 면접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내가 했던 질문 중 하나가, '당신은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한국 사무실과의 소통의 효율은 떨어질 수 밖에 없는데, 이 상태에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협업할 수 있겠는가?'였다. 이 문제는 당시 해외연구소와 협업 과정에서도 심각하게 느끼던 문제고, 지금의 코로나 시국에서 활성화된 재택근무 시에도 여전히 어려움을 겪는 문제인데, 당시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 '비전'이었다. 요컨대 역량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면 협업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것이었는데, 당시의 나를 지배하던 문제의식은 '관리의 부재'였던 터라 '아, 이 사람도 뜬구름 잡는 얘기나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흘려넘겼더랬다.

아마도 그들에게 필요한 역량을 보여주지 못한 탓으로 그가 말한 '비전이 이끄는 협업'을 경험해볼 기회는 없었고, 또 그 가치에 공감하지도 않았었기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나 다시 그 때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책을 만났다.


마이클 하얏트, "모두를 움직이는 힘", 로크미디어, 2021.


"지도자는 비전을 제시하지만 관리자는 비전을 실행한다."
— 모두를 움직이는 힘, p19.

'지도자'라, 정치인을 지칭할 때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보니 거부감이 살짝 들긴 하지만 그냥 '리더'보다는 좋은 번역인 것 같다. 각설하고, 당시의 그 아저씨는 이미 자신의 팀을 이끄는 '지도자'였던 것이고, 그 팀의 한국 지부를 셋업하는 작업의 중간에서 적절한 답을 제시한 것인데, 당시의 나는 비전과 전략, 지도자와 관리자의 차이도 모르면서 무작정 그 답을 폄하하기 바빴던 것이었다. 이렇게 무지에 대해 무지했음을 늦게라도 깨닫고 반성할 일이 또 하나 쌓인다.


"비전이란 조직의 미래에 대한 확실하면서 실행 가능하며 매력적인 자극을 줄 수 있는 그림이다."
— 모두를 움직이는 힘, p21.

그렇다면 비전이란 과연 무엇일까? 언뜻 좋아 보이기만 하는 이 개념이 '뜬구름'이 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마이클 하얏트의 <모두를 움직이는 힘>에 따르면, 비전이란 '확실하면서 실행 가능하며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미래에 대한 그림'이다. 조직의 비전은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게 하는 지향점이며, 그 곳에 도달하는 과정의 수많은 시도와 실패와 교훈과 성공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이고, 진짜 기회와 인재를 골라내는 필터다.

누구라도 답을 알고 나면 그 답이 뻔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사후해석편향 혹은 후견지명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다시 앞을 내다보자면 '확실함'과 '실행 가능성' 그리고 '매력'을 어떻게 비전에 담아낼지 막막하다. 막막함은 화를 불러일으키고 내가 예전에 그랬듯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데, 이 책은 무려 이런 요소들을 담은 비전 스크립트를 작성하는 과정을 가이드해주는 책이다. 물론 이 책을 읽는다고 그럴싸한 비전이 딱 완성되지는 않는다. 다만 무지에서 오는 화는 분명 누그러질 것이며, 결국 내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은 남겠으나, 이 책에 소개되는 과정을 거쳐서 이를 가다듬어가다보면 분명히 70점이나 80점짜리 비전 스크립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상 유지에 만족할 수 없고 당신의 노력을 한곳에 집중하고,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고, 사업 규모를 확장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비전을 추구하는 지도자가 돼야 한다."
— 모두를 움직이는 힘, p21.

글의 전개 상 이 쯤 되면 내가 작성한 비전 스크립트를 딱 꺼내들어야 하겠지만, 부끄럽게도 아직 작성하지 못했다. 다만 몇 년 전에 가졌던 문제의식을 여전히 갖고 있고, 더 이상 불평만 늘어놓으면 그만인 주니어가 아닌 상황에서, 이 책을 보고 나서도 내가 이끄는 조직을 위한 비전 스크립트를 작성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해서, 딱히 누가 보지도 않을 글이지만 오픈된 공간에 게시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비전 스크립트 작성을 강제하고자 한다.

💡 2021년 11월 13일 현재 이 글을 쓰고 있는데, 2021년이 가기 전에 비전 스크립트의 초안을 작성하여 부서원들과 공유하고, 그 스크립트에서 회사 내부적인 정보를 제거한 버전을 공개할 것이다.

 

"첫째, 미래에 대한 대비가 안 되어 있고, 둘째, 기회를 놓치고, 셋째,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우왕자왕하며, 넷째, 전략을 집행하는 데 실수하고, 다섯째, 돈, 시간, 인재를 낭비하며, 여섯째, 조급하게 마무리를 짓는 경향이 있다."
— 모두를 움직이는 힘, p46.

"당신의 팀은 당신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 그들은 당신보다 당신의 비전을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도 없다."
— 모두를 움직이는 힘, p111.

다시 리더와 관리자의 개념으로 돌아와서 글을 마무리하자면, 누구나 내가 이끄는 조직의 리더이자 내 조직이 속한 상위 조직의 관리자일 것이다. 내가 조직도의 말단에 위치하더라도, 혹은 조직이 없어 나 혼자라고 하더라도 이는 바뀌지 않는다. 비전의 부재가 가져오는 여섯 가지 리스크는 내가 어떤 조직을 이끌더라도, 심지어 개인적인 자기계발을 하더라도 동일하게 발생한다. 타인은 내 마음을 읽을 수 없지만, 나 또한 내 마음을 예측할 수 없다. 이게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비전을 글로 적고, 때때로 펼쳐보고, 계속해서 가다듬어야 하는 이유고, 이 책을 곁에 두고 때때로 꺼내들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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