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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란 게 되어버렸다

"김OO 님이 소파트장 자리를 맡아주셨으면 해요."
올 것이 왔다. 부서의 인력 구성이 변하는 흐름 속에서 내 위치를 알고 있었고, 파트장과 약간의 교감도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이럴 날이 언젠가는 올까 싶어 제법 노력도 했다. 그럼에도 막상 닥치니 '가슴에 얹힌 돌덩이'와 같은 진부한 수사가 왜 그렇게 진부해졌는지 알겠다 싶다.
 나를 포함해 4명이 전부인 작은 조직. 굳이 별도 조직으로 만들지 않아도 무방할 수도 있는 크기의 조직이라도, 이 조직을 이끄는 것이 내 새로운 일이 된 이상 어떻게든 질적으로 또한 양적으로 조직을 성장시킬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데이비드 버커스, 2019, 친구의 친구, 한국경제신문.

<씽큐ON>의 다섯 번째 선정 도서인 <친구의 친구>. 인맥이 형성되는 원리와 이를 키우고 이용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굉장한 책이었다. 어째서인지 개인간의 '약한 연결'을 언급하는 평이 많았던 이 책은, 책을 읽기 시작한 날의 사건으로 인해 편중된 내 관심사 때문에 조직 관리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책이어야 했고, 다행히도 읽는 내내 내 요구를 충족시켜주었다.


클러스터: 신뢰의 속도

"어느 정도의 클러스터는 실제로 네트워크 안에서 유용한 정보와 복잡한 아이디어, 새로운 기회들을 더 쉽게 확산시킨다."
- 친구의 친구, p126.
유용한 정보와 복잡한 아이디어. 정확하게 내가 속한 부서가 다루는 것이다. 우리 부서는 복잡하고 방대한 글로벌 표준 기술 문서에서 맥락을 찾고, 같은 표준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경쟁 제품과 협력 제품, 이들을 구매하는 고객사와 이들이 만들어내는 서비스를 고려하여 우리 제품이 어떻게 동작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로컬 표준 기술을 정의한다.
 제품에 적용되는 기술의 범위는 너무나 넓고, 글로벌 표준 기술의 범위 내에서 경쟁사보다 더 잘 동작하는 로컬 표준 기술을 만들어내기 위한 지식 수준은 상당히 깊다. 자연스럽게, 담당하는 표준 기술의 범주에 따라 조직이 나눠지고, 조직을 잘 나눌수록 조직 내에서의 소통만 상대적으로 원활해진다. 사일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가 새로 맡게 된 조직을 만들면서도 파트장과 나 모두 걱정한 것이 이것이었다. 얼마 크지도 않은 파트를 굳이 소파트로 또 나눠서 파트 내 실무 역할을 줄이는 게 맞을까? 지금까지 파트 내에서 좋은 분위기를 유지해왔는데 괜히 편가르기 하는 꼴이 되지는 않을까? 이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파트장이 이걸 결단한 이유는, '소파트 별로 관련 업무 전문성을 더 높일 수 있을 것 같다' 였다. 체감적인 판단이었을 것 같지만, 책에서 얘기하는 클러스터가 주는 이득과 정확히 일치하는 이유였다.

따라서, 소파트장으로서 내가 해야 할 첫 번째 역할은 소파트라는 클러스터 안에서 강한 연결이 만들어질 수 있는 조직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일 것이다. 기술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기술을 바라보는 방식의 일치, 업무를 진행해나가는 방식의 공유 및 발전은 작은 조직 내에서 극적으로 향상될 수 있다. 레이첼 보츠먼이 <신뢰 이동>에서 얘기한 신뢰성의 세 가지 특징, 1) 능력이 있는가, 2) 믿을 만한가, 3) 정직한가 모두 작은 조직 내에서는 투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개개인의 신뢰성에 걸맞는 신뢰를 서로에게 가질 수 있고, 거꾸로 높은 수준의 신뢰에 걸맞는 신뢰성을 가지려는 동기를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작은 규모에서만 가능한 직접적 신뢰의 힘이고, 구성원 간의 높은 신뢰는 더 많은 정보의 교환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신뢰는 정보의 교환을 빠르게 하고, 빠른 정보의 교환은 곧 그 조직의 역량이다.

브로커: 확장과 분업

"그들은 소규모의 신뢰 그룹을 보유함으로써 많은 비즈니스를 공유하고 배우고 성장하며 서로의 관계를 더욱 다져나갔다. 동시에 적당한 거리를 두는 관계(약한 유대관계)를 많이 보유함으로써 전체 환경을 살펴보고, 더 많은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 친구의 친구, p131.
디테일과 맥락이 모두 중요하다는 관점에 대해, 줌인(Zoom-in)과 줌아웃(Zoom-out) 병행, 나무와 숲을 함께 보기 등 널리 알려진 개념들이 있다. 클러스터와 브로커의 관계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특정 기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공유하는 클러스터에 기술과 조직, 사업에 대한 시스템적, 맥락적 관점을 제공하는 브로커가 있다면, 그 클러스터에서 생산되는 정보의 가치가 더욱 올라갈 확률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클러스터 내에 브로커는 몇 명이나 있어야 할까? 어떤 사람이든 자신이 속해있는 조직에 완벽하게 수렴하는 관계만 갖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든 조직 외부와의 연결을 갖고 있고, 그 연결을 통해 조직에 새로운 정보를 유입시킨다면 그 사람은 브로커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유입되는 정보는 단편적이고 파편화되어, 조직 내의 기존 정보와 시너지를 내기는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외부 정보의 탐색과 유입에 필요한 비용은 시간과 인지 자원이므로, 클러스터의 순기능을 얻기 위해 투입해야 할 동일한 자원의 양을 줄이는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클러스터에 존재하는 유한한 자원을 클러스터 내부의 연결을 강화하는 목표와 외부와의 연결을 늘리는 목표에 어떻게 적절히 배분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자연스럽게 투입량 대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자원-목표 조합을 찾는 문제가 되는데, 이를 '분업'이라고 한다.

 따라서, 내 두 번째 역할은 소파트라는 클러스터에 외부와의 연결을 만들어내는 브로커가 되는 것이다. 소파트장이라는 명목 직위 자체 때문에, 그리고 다른 소파트원보다는 상대적으로 오래 재직하면서 형성된 더 큰 사내 네트워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소파트 외부와 더 쉽게 연결될 수 있고 그 연결로부터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 따라서 소파트장은 소파트 내의 전문 브로커가 되기 가장 적절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위 관리자들의 관심사나 우리 소파트에 갖는 기대는 무엇인지, 다른 조직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우리가 하고 있는 일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 등의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가공하여 다른 소파트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소파트 전체의 역량을 올바른 방향으로 집중시킬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소파트원들은 소파트 내의 연결을 강화시키고 그 안에서 흐르는 정보의 질을 높이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효율적인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 수는 있지만 비효율적인 것은 효과적일 수 없다. 분업은 효율을 만들어내고, 맥락은 효율에 방향을 제공한다.

다면적 관계: 일과 삶

"동료들과 친구 관계를 맺는 것은 감정을 약간 더 소진할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생산성을 훨씬 더 높여준다."
- 친구의 친구, p309.
이상적인 의미에서 '친구'는 가치관을 공유하는 존재다. 직장에서 보내는 수많은 시간에 의해 일반적으로 '동료'는 익숙함, 물리적 근접성, 유사성을 갖는데, 따라서 가치관의 공유만 이루어진다면 동료는 진정한 친구가 될 가능성이 높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치관의 공유'야말로 매우 어려운 조건이 아닐 수 없는데, 가치관이 없기 때문이거나, 가치관이 있더라도 밝히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가치관의 전반적 부재는 가치관의 공유를 방해하는 요소이기도 하므로 매우 중요하긴 하지만, 가치관이 없는 상태에서는 이 이상의 논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단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왜 동료들과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이 어려울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개념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일과 삶이라는 것은 분리하기 어려운, 혹은 불가능한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관념 속에서 '일'과 '삶'은 양팔 저울의 양 쪽에 올라가는, 구분 가능한 별개의 어떤 것이다. 공과 사를 구분한다는 개념이나, '가족 같은 조직'이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는 상사로부터의 삶에 대한 일방적인 간섭도 이를 강화시키는데, 내 '삶'이라고 생각하는 영역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태도가 고착화된 결과일 것이다. '가치관'이라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스스로의 인생과 세상에 대한 관점이므로 기본적으로 '삶'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호 배타적인 일과 삶이라는 개념이 정립된 상태에서는 가치관의 공유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클러스터 내부의 강한 연결이 더 빠르고 복잡한 정보를 쉽게 처리할 수 있게 해준다는 관점에서, 관계의 다면화는 클러스터의 순기능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는 방안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파트 내의 관계를 업무 외적인 부분까지 확장시킬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상사로부터의 삶에 대한 일방적인 간섭'에 힌트가 있는 것 같다. 여기서 문제는 업무적인 요소가 삶의 영역에 (억지로) 침범하면서 발생한다. 반대로 삶의 요소를 업무의 영역으로 가져오면 어떨까? 예를 들어 매주 일정 시간을 서로의 업무 외적인 관심 영역에서 쌓은 지식을 공유하는 자리로 만드는 것이다. 충분한 동기만 만들어낼 수 있다면, 소파트원들이 서로를 더 이해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감정적인 유대가 높아지면 업무적인 소통도 더 원활해질 것이고, 삶이 안정화되면 같은 시간이라도 업무에 더 집중하거나, 본인의 의지에 따라서는 더 많은 시간을 업무에 투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소파트가 일 뿐만 아니라 구성원의 삶의 영역도 돌볼 수 있는 조직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내 세 번째 역할이다. 이는 구성원간 연결의 강화라는 면에서 첫 번째 역할과 유사하지만 일이라는 하나의 연결을 강화하는 것과는 달리 연결 자체를 추가함으로써 전체 연결을 강화하는 개념이라는 점이 다르다.
 처음은 <빡독x>와 같이 그냥 각자 좋아하는 책을 읽는 시간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소파트 단위 주간회의를 대신하면, 실질적으로 여기에 빼앗기는 업무 시간도 많지 않을 것이다. 책이라는 것은 관심사를 드러내는 지표니, 읽는 데 익숙해지면 각자 읽은 책을 간략히 소개하는 자리를 통해 삶의 영역에서도 서로 연결될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생각을 정리해서 나누는 행위 자체가 실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고, 나눈 생각이 섞이는 과정에서 어디든 도움이 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약한 연결'로

"결론적으로, 새로운 정보와 기회에 관한 한 현재의 강한 유대관계보다 약한 유대관계와 휴면 상태의 인맥이 훨씬 더 강력하다."
- 친구의 친구, p56.
너무 급진적인 아이디어는 저항을 맞기 마련이다. 특히 세 번째 역할은 이 회사에 몸담은 지난 7년간 들어본 적도 없는 매우 생소한 개념이다. 레이첼 보츠먼의 <신뢰 이동>에 소개된 페이스북의 사례나, 애덤 그랜트의 <오리지널스>에 소개된 카멘 메디나의 사례처럼, 익숙한 개념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접근하는 한편 낯선 개념을 지속적으로 노출시켜 익숙한 개념으로 만들어나가야 하겠다. 그러려면 내 생각을 더 잘 정제하고, 더 잘 표현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편으로 새로운 역할에 대해 마음만 앞서 고려해야 할 문제들을 놓치지는 않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책이 말하는대로 '약한 유대'와 '휴면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씽큐ON>은 생각을 표현하는 연습과 내가 강하게 연결된 클러스터 외부에서 겪는 약한 연결이라는 두 가지 면에서 완벽한 기회를 제공하는 커뮤니티이다. 애초에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것도 <씽큐ON>에 참여했기 때문이고, 이 글을 공유함으로써 책 뿐만 아니라 내 생각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피드백을 받을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휴면 관계'를 활용하는 것 또한 유효할 것이다. 일단은 예전에 내 부서장이었지만 지금은 아닌 분들을 한번씩 찾아봐야겠다. 부서장-부서원 관계가 끊어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휴면 상태가 된 관계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없던 '리더십'이라는 맥락을 통해 지금은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는 휴면 상태의 관계를 활성화시키는 데 있어 '주제를 정하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지만, 지금 내가 찾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 지금 내가 당장 다음에 할 일은 다음 두 가지다:
1) 글을 게시하고, <씽큐ON>에 공유한다;
2) 예전 부서장들에게 연락을 취한다.

과연 '조직관리'나 '리더십'과 같은 특정된 주제를 갖고도 '약한 연결의 힘'을 확인할 수 있을까?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는 것도 나에게는 큰 공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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