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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공평한 게임이다

간만에 큰 비가 지나간 일요일 아침부터 출근해 정신없이 일하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기록해둔다. 시간이 흘러 다시 이 글을 읽을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근 40년만에 내 인생관을 정립한 날이 될지도. 문득 <인생은 공평한 게임>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라는 똑같은 '자원' 이 주어지고, 길든 짦든 인생을 다 살아낸 뒤에 돌이켜봤을 때   스스로의 삶에 얼마나 만족하는지라는 '보상'은 아무와도 경쟁할 수 없는 게임.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만족감이란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니 누구나 자신만의 전략을 통해 달성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인생은 충분히 공평한 것 같다. 타인에게까지 일반화시키면 절대로 합의를 이뤄낼 수 없는 관점이다. 하지만 인생관이라는 건 나의 인생에 대한 나만의 관점인 거니까, 다른 사람의 동의는 중요하지 않다. 똑같이 이 인생관은 나만의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일도 없어야겠다. 특히 한창 천둥벌거숭이인, 자는 모습이 미칠 듯이 사랑스러운내 아이에게는 더 조심해야겠지.

흥미롭지만 남 일 같은

"2018년 봄 무렵, 나는 책상에 앉아, 죽은 뒤 하고 싶은 말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 p335. 별 이유 없이 자기 계발서를 싫어하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와 닿지 않던 말 중에 '내일 세상이 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는'다든지, '내일 당신이 죽는다면 오늘 하고 싶은 일을 지금 당장 하라' 따위의 말들이 있었는데, 딱 드는 생각은 '어쩌라고' 였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결국 현재에 충실하기 위해 끝을 생각하라는 거였는데, 도무지 끝을 떠올릴 수도, 현재에 충실하라는 게 어떤 건지도 실감할 수가 없었다. 십수년이 지나 정말 그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열심히 살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인생의 끝이라는 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머리로는 삶의 유한함을 알고, 시간의 부족함을 아쉽게 느끼고, 문득 돌아보면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실감하지만, 그래도 어떤 형태로든 죽음이라는 것을 실감하지는 못한다. '모든 것이 기록되는 디지털의 시대에 죽음이란 남겨진 사람 혹은 죽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렇게 열심히 사는 와중에 재미 있는 책을 읽었다. 디지털의 시대에 죽음이란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누구나 디지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다양한 디지털 발자국을 남기고, 한계비용이 극도로 낮아진 상황에서 이 발자국들은 발자국 주인의 생사와 무관하게 오래도록, 혹은 영원히도 남는다. 발자국의 주인이 생물학적으로 죽었을 때, 남겨진 사람들 - 가족이나, 온/오프라인 친구, 지인들 - 이 고인을 기억하는 방식 또한 영향을 받는다. 전통적으로 고인의 유산에 대한 접근 권한과 통제 권한을 부여받았던 가족들은 더 이상 그 권리를 자동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오히려 그 권한은 고인이 생전에 디지털 세계에서 가까웠던 친구, 혹은 그 플랫폼을 운영하는 기업이 가진다. 점차, 그리고 이미 생각보다 더 빠르게 생활 반경이 온라인으로 옮겨가는 시대에,

나를 욱하게 하는 사람들 (못 참는 아이, 그리고?)

못 참는 아이 아이를 둔 부모라면 오은영 박사의 < 못 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 >라는 책을 읽어봤거나, 들어는 봤을 것이다. 아이의 육아를 고민하며 아내와 같이 이런저런 육아 관련 서적들을 사 모으던 시절 - 솔직히, 다 읽지는 못했다 - 아내가 골라온 책이다. 제목도 좋고 내 기억에는 내용도 나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아내는 각론보다는 이상 - 욱하는 순간 좋은 육아는 글렀다는 느낌의 - 을 강요하는 느낌을 받아 불편하더라고 평했던 책이다. 여기서 핵심은 '각론'일 것인데, 잘은 모르지만 심리학이라는 것이 자연과학처럼 딱 떨어지는 인과를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가 주요한 원인이 아닐까 싶다. 어떤 행동이라는 결과까지 수많은 원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명쾌한 정리가 불가능한데, '못 참는다' 라는 아이의 행동과 '욱 한다'는 어른의 행동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적일 것이다.  결국 '아이는 왜 이렇게 못 참는가?'라는 질문과 '나는 왜 이렇게 욱하나?'라는 질문은 풀리지 않는 채로 남는다. 어쨌든 아이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부모를 시험한다는 것을 새삼 자각하면서. 말 안 통하는 부모와 직장 상사 사춘기를 겪어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의 가치관이 형성된 성인이라면 대부분의 부모와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하고, 심하게는 좌절스러웠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대체로 인생과 세상에 대한 관점, 특히 정치에 대한 관점에서 이런 충돌이 일어난다.  건전한 토론이라는 미명 하에 정치 이슈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 시작하지만, 서로 자기 말만 끝없이 반복하며 감정만 소모되고 있다는 것을 깨닿는 순간이 있다. 이렇게 되면 부모는 자식을 몽매한 철부지로 취급하고, 자식은 부모를 완고한 꼰대로 규정해버린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관대한 인간이라는 존재답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지는 않는다.  부모-자식 간이 아니라더라도, 가까운 가족 간의 이러한 갈등은 흔한 것 같다. 개

자존감이 한 톨 높아지는 순간

내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자각하며 묘한 뿌듯한 느낌을 받는 순간. 정작 학생일 때는 볼펜을 끝까지 써본 기억이 거의 없다. 매번 잃어버리거나 망가지거나. 솔직히 지금 쓰는 펜이 워낙 빨리 닳긴 한다. 매일 공부를 하고,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다 보면 두 달도 채 못 가는 느낌인데, 펜 구매비용을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사정이 나쁘지는 않고, 사용감이 워낙 마음에 드니 계속 사용 중. 하나를 다 쓰고 항상 들고 다니는 예비를 새로 꺼내드는 순간 스스로에게 느끼는 만족감은 덤인데, 이 덤 덕분에 또 동기부여가 된다.

장인어른의 은퇴를 앞두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휩쓸 것 같은 사회적인 공포가 어느 정도 지나가고, 정부가 '생활 속 거리두기'로 지침을 완화한 5월, 장인어른의 은퇴 소식을 들었다. 정확하게는 은퇴 예정 소식인데, 최근 코로나 사태로 회사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결국은 사업을 정리하게 되어 6월까지만 출근하시기로 했다고 한다. 주가는 왜 이러나 싶게 금새 회복해버렸지만 경제는 엉망이라는 얘기가 계속해서 들리는 와중에, 장인어른이 다니시던 회사도 코로나 사태로 미국 시장이 얼어붙어버린 것을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무려 38년(!)이나 이어온 사회생활을 갑자기 마무리하게 되면서, 장인어른도 장모님도 크게 내색은 안 하시지만 내심 당황하신 기색이다. 월급사장이라고는 해도 사장님이어서 그랬던 것일까, 두 분 모두 장인어른의 은퇴 이후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준비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은데, 그 날이 너무 급작스럽게 닥쳐버렸다. 향후 가격이 오르지 않을까 기대하며 갭투자해둔 작은 아파트를 월세로 돌리면 어떨까, 장인어른 회사 근처의 오피스텔을 구입해서 월세를 주면 어떨까 등의 이야기가 두 분 사이에 오가고,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 중에 금방 감정이 예민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두 분 모두 갑작스러운 큰 변화에 황망함을 느끼시는 것 같다. 어쨌든 긴 세월의 수고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니 기념하는 파티를 열어야겠다고 화제를 돌려놨지만, 이제는 나에게 있어서도 두 분의 노후가 당면한 과제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유튜브에 <대기업 임원 남편이 퇴직하고 벌어진 일>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올라왔다. 채널은 <체인지 그라운드>. 구독은 해놨으나 챙겨보지는 않는 채널인데, 이 제목은 눌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웅이사의 하루공부>라고, 이 회사 대표가 매일(!)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소개해주는 시리즈의 영상이다. 업으로 한다고는 해도 이것만 하는 게 아닌데 매일 이걸 해낸다는 건 정말 대단하다. 나는 주 1권 독서하고 서평 쓰는 것도 쉽지 않던데 말이지

눈으로 본다고 해서 아는 것은 아니다

온 몸의 피부가 벗겨진다는 것 이탈리아 밀라노 두오모의 성 바르톨로메오 입상. 전신 피부가 벗겨지는 형벌을 당해 순교했으며, 몸에 두르고 있는 게 자신의 가죽이다(!). 2015년 여행 중 촬영. 온 몸의 피부(혹은 가죽)이 산 채로 벗겨지면 어떤 느낌일까? 자극적인 영상 매체에 종종 등장하는 소재인데, 살짝 상상만 해봐도 끔찍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누군가 손발이 잘려나가는 고통을 겪고 있어도, 내 손에 생긴 생채기가 더 고통스러운 것이 사람인지라, 솔직히 이 고통을 내가 제대로 이해할 방법은 없다. 혹시라도 그런 기회가 있다면? 진심으로 그런 일은 없었으면 한다. 2015년에 이탈리아 밀라노 두오모에 갔을 때다. 아무런 배경지식도 없이 그냥 대성당의 규모에만 감탄하면서 내부를 구경하고 있던 차에, 성 바르톨로메오 입상을 봤다. 멀리서 봤을 땐 '왠 대머리 아저씨가 삐딱하게 서 있나?' 이런 느낌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갔을 때는 근육이 쫙쫙 갈라져 있는(!) 근육남이 중요한 부위만 거적데기 같은 걸로 가리고 서 있는 줄 알았다. 더 가까이 가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성당에 왠 해부학 모형 같은 걸 뒀지?'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입상의 뒤로 돌아가서 거적데기의 정체를 안 순간,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손가락, 발가락, 얼굴모양이 선명한 거적데기라니! 알고 보니 대머리 아저씨의 정체는 성 바르톨로메오였고, 가톨릭 박해 때 온 몸의 가죽이 벗겨지는 형벌을 당해 순교하셨다고 한다. "살아 있는 사람의 피부를 산 채로 벗기는 섬뜩한 일이 벌어지는 경우 희생자가 느끼는 고통은 탈수에서 비롯된다." - 피부는 인생이다, p26. 어떤 고통이었는지를 이해할 방법은 여전히 없지만, 그 고통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는 5년이 지나서 이해할 수 있었다. 탈수. 마찬가지로 생명을 위협하는 탈수의 고통을 느껴볼 기회는 내 삶에 없었으면 한다. 하지만 피부가 벗겨지

생각이 좋다고 좋은 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존 리, 2020, 존리의 부자되기 습관 , 지식노마드 <부자는 알지만 가난한 사람은 모르는 것> 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을 통해 존 리라는 사람을 처음 알았다. 쇼핑몰을 통해 돈 잘 버는 법으로 시작해, 최근에는 이런저런 주제에 대한 인터뷰 영상을 올리는 < 신사임당 >이라는 채널에 올라온 영상이었는데, 원래도 내가 주식에 대해 갖고 있던 모호한 관점을 더 직설적이고 과감하게, 말인즉슨 명확해 보이게 주장하는 인터뷰이가 제법 인상적인 영상이었다.  이 영상을 계기로, 또 이 영상 즈음에 유튜브 피드에 이 사람이 제법 노출되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영상들을 두어 편 보고는 최근의 저작인 이 책을 덜컥 사버렸다. 책도 얇고, 내용도 대체로 익숙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여행이라도 가게 되면 호텔 방에 앉아서 가볍게 읽으면서 내 투자관을 점검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상당한 고통이었던, 그리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사회적 거리두기'의 중간에 석가탄신일로부터 어린이날에 이어지는 징검다리 연휴가 시작됐다. 코로나19에 대한 방역이라는 한 가지 관점만으로 바라보자면 결코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지만, 아내와 나는 짧은 여행을 계획했다. 어린이집이 무기한 휴원하는 동안 아이를 혼자 감당하시느라 지쳐가는 장모님으로부터 아이를 떼어 놓는 한편, 한 동안 찾아뵙지 못한 부모님도 찾아뵙고, 아이가 집에 없는 두 달 동안 격무에 시달린 우리에게도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본가와 호텔에 2박씩을 하던 하루, 격렬히 놀고 장렬히 전사한 아이를 옆에 두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예상했던대로 얇고 쉽게 읽히는 책이었기 때문에 대략 한 시간 반 정도 걸려서 다 읽었다. 올해 독서 목표 50권 중 한 권을 읽는 성과를 거뒀지만... 남은 건 없었다. 산출물에 대한 자본의 기여를 인정하는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고, 돈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위해 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저자

일상의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는 방법

일상의 스트레스가 나를 짓누를 때 일상의 쳇바퀴를 빠르든 늦든 정신 없이 돌다 보면 스트레스가 나를 짓누르는 순간이 온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상에서 잠깐 벗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혹은 혼자서 멀리 여행이라도 다녀 오면 - 꼭 물리적인 이동이 아니더라도 -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도저히 쳇바퀴에서 내려올 짬이 나지 않으면? 아니면 잠깐의 휴식 기간에 쳇바퀴가 더 크고 무거워져 있으면?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세요,'라는 구호가 공허하게 들리는 사람들은 아마도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이럴 때는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쳇바퀴에서 내려오거나 돌리는 속도가 현저히 늦어지지 않는 선에서 스트레스를 풀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에게는 그 방법이 농구였다. 근 30년 전에 처음 농구공을 만져본 뒤로, 내 인생의 대부분에서 농구는 내 첫 번째 취미였다. 격렬한 운동인데다 전문 선수처럼 몸 관리를 하지는 못하기에 부상의 위험도 경험도 많지만, 삶의 더 중요한 영역에 집중하기 위해 온갖 취미들을 포기하는 와중에도 농구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일이 정신없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잠깐의 짬이 나거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꼭 체육관에 가서 픽업 게임을 잠깐이라도 하고 왔다. 이럴 때마다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한 말은 '체육관에 가서 빡세게 몇 게임 뛰고 나면 강제로 스트레스가 풀린다' 는 것이었다. 정신 없이 일을 하다 보면 정신적으로 에너지를 많이 쓰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잠을 줄이게 되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매우 피곤한 상태가 된다. 그 와중에 나름 격렬한 운동인 농구를 잠깐 짬을 내서 급하게 하다 보면 부상 위험이 제법 높다는 것은 오랜 구력을 통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격렬한 운동을 하고 난 후의 피로감이 업무에 미치는 영향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견 불합리해보이는 선택을 계속해온 것은, 그저 좋아하는 활동을 함으로써 얻는 만족감과, 그

간단하고, 지속 가능한 체중 10% 감량법

20년간 유지해온 몸무게가 어느새 10% 줄었다 가능한 매일 밤 체중계에 올라가는 버릇을 들인 지 2년, 예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숫자가 찍히기 시작했다. 성장이 멈춘 고등학교 2학년 이후 20년 동안 내 몸무게는 82~85kg의 박스권(!)을 횡보하고 있었다. 몸무게만큼은 우상향하는 것이 좋은 게 아니니 굉장히 성공적인 체중 관리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BMI 기준의 적정 체중이 대략 72~73kg인데 과체중과 경도비만의 경계를 오락가락하는 것이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라, 기회만 되면 80kg 밑으로 감량을 해 보려고 시도했으나 단 한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 몇 달 사이에는 체중이 쭉쭉 줄어들더니, 급기야 밤에 재는 체중이 - 공복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건강검진에서 재는 체중보다 높고 들쭉날쭉하게 나온다 - 75kg 밑으로 내려가는 날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에 특별히 다이어트랍시고 이 악물고 굶거나 운동을 더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해서, 그 동안 열심히 올라간 체중계가 모아둔 데이터를 한 번 분석해보기로 했다. 그림1. 지난 2년 동안의 내 월평균 체중, 체지방율, 근육율. 최근 6~8개월 사이에 급격히 감소했다. 이 그래프는 내 월 평균 체중, 체지방율 및 근육율 표시한 것이다. 대략 2019년 봄까지는 기존의 박스권에서 체중이 유지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서서히 낮아져서 80kg 초반으로 내려오다가, 대략 늦여름~가을을 기점으로 급격히 감소해서 현재 시점이 올해 봄 기준으로 76kg 밑으로 내려온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체중을 밤에 잰다. 아침 공복 체중 대비 약 1~2kg은 더 나오는 밤 체중의 월 평균이 이 정도면, 건강검진 시 측정하는 체중으로는 BMI 기준 정상 체중에 거의 근접한 것으로 봐도 될 것 같다.  게다가 운동을 안 하거나 건강이 나빠져서 체중이 빠진 것은 아니라는 것은, 빨간 색 선으로 표시되는 체지방율이 20% 초반대에서 10%

우리가 리더십을 함양해야 하는 이유

도리스 컨스 굿윈, 2020,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 커넥팅. '아무 말 필요 없고, 그냥 읽으세요, 제발.' 솔직히, 이 책을 읽는 내내 서평은 이렇게 쓰고 치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책에는 이름은 들어봤지만 아는 건 없던 네 명의 미국 대통령들 -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즈벨트,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린든 존슨 - 이 어떻게 시대의 리더로서 성장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는지, 그들의 리더십으로 시대의 주요한 문제들 - 남북 전쟁과 노예해방 선언, 석탄 파업과 , 대공황과 '뉴딜' 정책, 공민권법 제정과 '위대한 사회' 정책 - 을 풀어내는 과정과 그 과정마다 얻을 수 있는 리더십의 교훈들이 너무나 깔끔한 구조와 평이한 문장에 담긴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어져 있었다. 나는 이 한 문장조차 깔끔하게 정리를 못하는데 말이지.  코로나19 사태와 회사 일로 정신 없이 흘러간 지난 2주에 걸쳐 틈틈히 이 책을 보면서, 이 네 명이 보여준 치열하게 노력하는 삶, 시련을 극복하는 정신력, 그 밑바탕에 자리한 이타적인 야망에 끊임없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일어났던 거대한 사건들과 이들의 리더십이 절묘하게 만나서 말 그대로 '역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경이감을 느꼈고, 그 속에서 치열하게 노력하고, 고민하고, 해답을 만들어가는 어려움에 공감했다.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너무 많은 걸 배우고,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돌아다녔는데, 이 중 뭘 잡아올려서 글로 만들어내고, 사람들에게 이 책이 읽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심지어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아닌데. "통찰력 있게 노예제도라는 쟁점을 파고들며, 청중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키려 애썼다. 링컨은 진실하고 명료하며, 확신에 찬 열정적인 이야기로 청중을 설득하고,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p211. 링컨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가

어디에 갖다 놔도 평균 이상은 할 아이

어디에서도 평균 이상   '어디에 데려다놔도 평균 이상은 할 아이.' 돌이켜보면, 이 이상으로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평가가 있을까 싶다.  내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 당시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뻤고 자부심을 느꼈노라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이 말을 들은 이후 - 언제였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렸다는 기쁨과, 존경하던 선생님의 평가에 기댄 자신감과, 두 분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는 불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이런 복잡한 감정 때문에, 이 평가는 나에게 있어 더 열심히 공부하게 하는 동기였던 동시에, 현실에 안주하게 하는 - 평균만 넘으면 되니까, 최고를 추구할 필요는 없었다 - 핑곗거리였으며, 무엇보다 도전을 피하게 만드는 심리적 장벽이었다. 다행히 나에게는 생물학적, 문화적으로 부모님께 물려 받은 재능이 소위 학교 공부에 더 적합했던 운이 있었다. 공부에 집중하지 못할 가정 내 불화나 어려운 살림 등의 환경도 없었다. 이런 커다란 운에 힘입어 공부라는 선형적인 영역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얻기 시작하자, 지식의 부익부빈익빈적인 특성에 의해 의도했던 것보다 더 높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고, 수능이라는 단발 시험에서의 운이 더해져 결국 상위 1%(!)에 해당하는 실력 대비 과한 성적표를 받아들게 됐다.  당시에는 소위 '수능 특차'라는, 수능 시험 점수가 깡패인 전형이 존재하던 시절이었고, 그 해 이과 응시자 총 수가 20만명 수준이었으니, 전국 2천등 수준의 점수면 대충 계산해보더라도 어딘가의 의대나, 서울대학교 공학계열 정도는 충분히 노려봄직한 점수였다.  하지만 내 선택은 연세대학교 공학계열이었다. 나는 내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의사는 지루한 직업이고, 서울대는 산구석이라 놀기 불편하고, 포항공대나 카이스트는 너무 시골이라 놀 게 없다는 식의 쿨함을 내세웠다. 하지만 내심 나는 소위 최고레벨의 학교에서 경쟁하는 것이 두려웠고, 같

즐거운 독서를 위해 필요한 것들

왜 몰입이 안될까? 이상한 기분이다. 분명히 얇고 쉽게 읽히고 재미도 있는 책인데, 정작 나는 책의 내용에 빠져들지는 못하고 있는 것은. 책의 내용은 이렇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밤하늘을 보면서 만들어낸 48개의 옛 별자리들이 있다. 이 별자리들은 최고신 제우스가 훌륭한 업적을 남긴 동물이나 인간을 기리거나, 한 때 훌륭했으나 스스로의 오만함에 발목 잡힌 자를 통해 인간들에게 경고를 남기기 위해 하늘에 새겨졌다. 그래서 각 별자리들은 신화 시대의 신들이나 인간들, 동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그 이야기들로부터 헌신의 가치, 오만의 위험 등의 교훈을 후대에 알려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과학적인 탐구를 통해 세상을 더 정확하게 알아내는 중에도 이 별자리들이 갖고 있는 이야기들에 공감하고 기존의 별자리들을 보존하려 한 반면, 현대의 과학은 더 넓고 깊어진 관찰 능력을 통해 우주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되면서 이런 이야기들의 가치를 무시하게 된 결과로, 별자리들을 무의미하고 추상적인 기호로 만들어버렸다. 데이비드 W. 마셜, 2020, " 하늘에 그려진 이야기 ", 커넥팅. 이 책은 저자가 고대의 별자리와 그 별자리에 담긴 이야기, 교훈 등을 보존하고자 하는 마음에 쓴 책이다. 앞서 언급한 그리스 신화들과, 그로부터 생겨난 별자리들을 소개하고 있고, 하늘에서 이 별자리들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별자리들을 어떻게 생활에 활용했는지 함께 소개하고 있다.  얇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며, 밤하늘과 천문에 흥미가 있거나, 그리스 신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제법 재미있기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에 해당한다면 더 좋지 않을까. 배경지식, 그리고 흥미 돌이켜보면 아마도 아직 국민학생이던 시절 - 난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세대다 - 가장 재미있게, 즉 여러 차례 읽었던 책 중 하나가 <호메로스 이야기>, 그러니까 아마도 <일리아스>였다. 그게 벌써 근 30

만족스러운 노년을 위해 필요한 것들

"그런 노년을 나는 바라 마지 않는다." - 나이듦에 관하여, p160. 보통은 부정하기 바쁜 노년이라는 것을 '바라 마지 않는다'니, 어떤 노년일까? "바라건데 운이 따라서 노년기의 대부분 동안 그래 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더라도 초반에는, 높은 자존감과 주체성 같은 중년의 장점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공명심으로 착각하기 일쑤였던 허영심이 잦아들고, 마음이 관대해지고 남을 돌아볼 줄 알게 되며, 내가 내린 결정을 끝까지 밀고 나갈 추진력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인생 목표를 추구하는 여유와 깊이가 다른 삶의 만족감을 맛본다." - 나이듦에 관하여, p159.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매력적이다. 아내와 곱게 그리고 사이 좋게 늙어가자는 얘기를 할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노년의 내가 이런 요소들을 갖추고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자존감과 주체성, 관대함과 배려, 추진력이라니, 이런 것들이 과연 노년에도 붙들고 있을 수 있는 요소이긴 한 건가? 거기다 새로운 인생 목표라니, 이거야말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다. 아내와 내가 원하는 '함께 곱게 늙기'는 대충 이런 모습인 것 같다. 여기까지는 어떻게든 될 것 같지만 그 다음은 어떨지..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gb-photostream/16429274630 ) 내가 대충 70대의 고령이 되어 명실상부한 노인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자존감과 주체성은 신체적인 건강과 재정적인 여유를 통해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운이 좋아 건강과 경제력이 잘 유지된다면, 사회가 유지되는 이상 약해진 신체 능력을 돈으로 보완하면서 여전히 많은 일들을 스스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관대함과 배려는 평생에 걸쳐 함양해나가야 하는 소양인 것 같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기본적으로 여유가 뒷받침되어야겠지만 여유 있다고 인심 좋다는 법은 없으니 이 부분은 내가 더 노력

잠이란 무엇인가? (매슈 워커,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 요약하기#1)

나와 주변 사람들의 건강 그리고 인생을 이루는 가장 크고 중요한 요소인 '잠'에 대해 알 수 있는 최선의 지식이 가득하기 때문에, 이 책은 따로 평을 하거나 감상을 하기보다 요약을 해야겠다. #1. 잠이란 무엇인가 수면은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큰 생물학적 수수께끼 중 하나다. - 자는 동안 '식량을 모으거나, 사회 활동을 하거나, 번식을 하거나, 자식을 키우고 보호하거나, 심지어 스스로를 보호할 수 도 없음' 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종은 잠을 잔다. - 이 모든 페널티를 감수하고서라도 잠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엄청난 혜택 이 없다면, 잠이라는 메커니즘이 출현하고 존속하는 것을 막는 강한 진화압이 가해졌어야 한다. 수면은 매일 우리의 뇌와 몸의 건강을 새롬게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유일한 수단이다. 너무나 중요해서, 하룻밤 잠을 설쳤을 때 몸과 마음에 생기는 이상들에 비하면, 음식이나 운동을 하루 걸렀을 때 생기는 문제들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이다. 수면의 패턴을 결정하는 첫 번째 요소는 평균적으로 약 24시간 15분의 주기를 갖는 체내시계이다. 시교차상핵에서 제어되고 멜라토닌에 의해 몸에 전달되는 이 수면 리듬은 수면 자체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각성 욕구의 정도를 조절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개개인의 수면 패턴에 영향을 준다. 시교차상핵은 특히 시각을 통해 전달받은 신호 - 주로 햇빛 - 을 통해 수면리듬을 24시간에 맞게 조정한다.  시차가 발생하는 여행을 할 때, 이 신체리듬은 이동한 지역의 햇빛 신호를 주로 활용하여 하루에 약 1시간정도 수면리듬을 조절할 수 있는데, 생물학적인 체내 시계가 24시간보다 약간 길기 때문에 하루를 늘리는 것이 줄이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이는 서쪽으로의 여행이 동쪽으로의 여행 대비 시차 적응이 수월한 한 가지 이유이며,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잠드는 시간을 늦추는 것이 앞당기는 것보다 신체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용이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하

당신도 훌륭한 독재자가 될 수 있다

나도 독재자가 될 수 있을까? "코빌드(Cobuild) 영영 사전에는 '자신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잔인하고 불공정한 방식으로 대하는 사람'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따라서 왕이 아니어도, 잔인하고 불공정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곧 독재자가 된다." - 폭군, p255, <역자 후기> 중에서. 아무래도 답은 'Yes'인 모양이다.  책 읽고 감상을 적는 글에서 첫 번째로 인용하는 문장을 역자 후기에서 찾게 될 줄은 몰랐는데, 너무나 핵심이 담겨 있는 문장이라 넘어갈 수가 없다. 보통 역사 시간이나, 문학 작품, 뉴스에서 만나는 공인된 독재자들은, 그 스케일이 최소 하나의 국가 단위이기 때문에 그 독재자들에 대한 비판은 할지언정 나와 내 주위에 비추어 반성하는 마음을 갖기는 어려운 것 같다. 최소한 나는 대량 학살을 저지르거나, 내 입맛대로 법을 변경하거나 하는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으며 그럴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적도 가질 리도 없으니까. 그들의 잘못은 어디까지나 나와는 무관한 그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네이버 영어사전에서 'tyrant'를 검색하면 영영사전 검색결과로 '잔인하고 불공평한 방법으로 자신이 권위를 갖는 사람들을 다루는 사람'이라고 나온다. 마침 코빌드 영어사전이다. 능력은 그렇다 치고, 마음은 어떨까?  정치나 사회 뉴스의 댓글로 달리는 주장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만은 이미 훌륭한 독재자인 사람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각종 혐오 발언들이나, 사회 현안에 대한 극단적인 반응들은, 그럴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누군가의 자유를 일방적으로 억압하거나, 누군가의 생명을 일방적으로 빼앗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좀 더 작은 인간관계의 수준에서도, 상대방의 권리나 의사보다는 내 욕구가 우선 충족되기를 바라거나, 나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일임에도 상대방의 손해를

밀레니얼 이코노미의 밀레니얼인 우리는 왜?

나도 밀레니얼? 언젠가 'X세대'니 'Y세대'니 하는 말들이 있었다. 이런 얘기가 나오던 시절에는 아직 학생 때이기도 했고 뭣도 몰랐으니까, 으레 언론에서 내세우는 이런저런 키워드의 하나일 뿐이라고만 생각하고 신경쓰지 않고 살았는데, 최근에는 '밀레니얼 세대'란다. 이것도 그냥 기반이 되는 단어의 특성으로 미루어(Millennium,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되는 시기) 2000년대생인가보다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 걸? 점점 이 세대에 대한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리더니 심지어 <밀레니얼 이코노미>라는 책이 나왔다. 어떤 세대의 이름이 붙는 경제에 대해서 얘기하려면 경제 시스템 내에서 그 세대의 영향력이 주요한 수준이어야 할 것 같은데, 2000년대 생들이면 아직 경제활동을 할 나이가 아니다. 그제서야 내가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나 해서 찾아봤더니.. "통상 밀레니얼 세대는 1981~1996년에 탄생한 이들을 의미한다." - 밀레니얼 이코노미, p10. 어, 나네? 내가 1982년생이니까, 이 정의에 의하면 '밀레니얼 세대'의 앞 줄에 서 있는 셈이다. 그리고 우리 부서에 최근에 들어온 신입사원이 1994년생이라고 했으니까, 딱 내 얘기, 우리 얘기인 셈이다. 그렇다, 학위를 마치고 이제 막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나이부터 이제 십 년 너머 사회 생활을 영위하여 각자의 조직 내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나이 정도니까, 딱 우리나라 경제의 주요 세력으로서 위치를 확보하기 시작(해야)하는 세대가 밀레니얼 세대인 것이다. 왜 '밀레니얼 이코노미'라는 말이 어색할까? 홍춘욱, 박종훈, 2019, 밀레니얼 이코노미 , 인플루엔셜. 이 책은 내 세대, 그러니까 밀레니얼 세대가 이끌어 가야 할 2020년 이후의 대한민국 경제의 다양한 면에 대해서, 두 명의 전문가가 대담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다. 밀레니얼 세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하느님께서 맺어 놓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 마르코 복음, 10장 9절. 나는 가톨릭 신자로서 아주 독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결혼과 가정에 대한 관점만큼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아주 많은 영향을 받았다.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내 삶에서 매우 중요한 목표 중 하나이고, 실제로 사랑하는 아내와 5살 된 아이는 나에게 큰 행복일 뿐만 아니라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동기의 원천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는 내가 연휴 첫날 아침부터 책 읽고 서평 쓰러 나오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기독교의 가르침은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조던 피터슨이 <인생의 12가지 법칙>에서 주장한대로 하느님의 일견 변덕스러운 의지에는 일희일비하지 말고 그저 최선을 다해서 살라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교리라면, 결혼 생활이 어렵더라도 어떻게든 배우자를 더 사랑함으로써 극복해야지 갈라서는 것을 선택하지 말라는 것이니 맥이 통하는 가르침이긴 하다. 현실은 가르침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일단은 이혼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이 얘긴 접어두기로 하자.  정말 문제는 따로 있다. 하느님이 맺어 놓으신 것을 하느님은 갈라 놓으실 수도 있다는 것.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죽음을 통해서일 것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 서로 사랑하고 아끼더라도 나와 아내 중 누군가는 먼저 하느님 곁으로 갈 것이다. 그러면 남은 사람은 재혼을 실행에 옮기기 전까지는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 재혼의 가능성을 무시한다면 요즘 같이 기대 수명이 긴 시대에는 일찍 사별해서 오래 혼자 살거나, 노년에 혼자 살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미혼, 비혼, 이혼, 사별 연도별 혼인건수 및 조혼인율(인구 1천명 당 혼인 건수) 추이. 직전 40년간 조혼인율이 지속적으로 감소 추세인 것을 볼 수 있다. 통계청 제공 <2018년 혼인 이혼 통계>

저녁 있는 삶을 위한 재테크를 가르쳐 드립니다

일과 삶의 균형 "저녁 있는 삶" 언젠가 어느 대선 후보의 공약이었던가. 당시에는 이게 얼마나 어렵고 복잡하고 중요한 얘기인지 몰랐다. 저녁 없는 삶을 산 지난 7년 반 - 회사만 그렇고, 사실 사실상 대학원생 때도, 대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딱히 저녁 있는 삶을 살았던 기억은 없다 - 을 지내면서야 비로서 '저녁 있는 삶'이라는 것이 보통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녁 있는 삶을 얻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처음에는 누군가가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매니저가 완벽하게 짜여진 업무 할당과 성과 배분으로 만들어주든, 정부가 강제로 업무 시간을 제한해서든.  완벽한 매니저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진작 깨달았다. 사실 당연한 것이다. 그들도 불완전한 사람일 뿐이고, 조직의 위에서 보면 실무자에 불과했다. 그럼 이 나라에서 게임의 룰을 바꿀 수 있는 주체인 정부는? 마침 이번 정권 들어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됐다. 조직이나 업무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이거라도 있어서 조금은 숨통이 트인다고 한다. 그래도 한 달에 한두 번은 평일에 해 지기 전에 퇴근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나는? 일반적으로 퇴근 시간은 밤 10시고, 주말 중 하루는 거의 대부분 출근해서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한다. 주 52시간을 가득 채우는 것을 넘어 시스템에 카운트되지 않는 업무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심지어 집에서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일을 한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게 내 일과 삶의 균형 - 앞으로는 짧게 워라밸이라고 하자 - 관점에서 최선이라고 내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 주 6일 52시간 초과해서 일하고 매일 자정에 집에 돌아오는 게 어떻게 최선의 워라밸일 수 있을까?  처음으로 이런 개념을 떠올린 건 '경쟁'이라는 개념을 인지하기 시작하면서였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경쟁'을 전제로 한다. 아니, 조던 피터슨에 따르면